몽마르뜨(Montmartre)는 파리의 북쪽에 위치한 18구의 일부 지역에 붙여져 있는 지명이다. 몽마르뜨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마르스(군신)의 산(언덕)(Mont de Mercure)’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와, 서기 272년에 성(聖) 도니와 2명의 제자가 순교한 곳이기에 ‘순교자의 산(언덕)(Mont des Martyrs)'이라 불리던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단어만을 놓고 본다면, 지명의 앞자리에 들어가 있는 'mont'가 프랑스어에서 '산' 또는 '봉우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몽마르뜨를 '언덕'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어색해 보일 수도 있다.
아마도 이 봉우리가 오늘날과 같이 유명해지기 전까지 '몽마르뜨'란 이름은 그저 파리 외곽의 전원마을에 있는 낮은 산 인근지역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사실 '몽마르뜨 언덕'이라고 부르고 있는 몽마르뜨 지역의 꼭대기라고 해봐야 해발고도로 불과 129미터에 불과하다. 따라서 '몽마르뜨라는, 언덕으로 이루어진 구릉의 정상'이 어느 날부터인가 마치 ‘몽마르뜨 언덕’인 것처럼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몽마르뜨란 이름 안에는 이미 '높은 지역'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보니 몽마르뜨는 그냥 '몽마르뜨'라고만 불리는 것이 의미상으로는 옳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몽마르뜨'를 하나의 고유한 지명으로 본다면, 지역의 지리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언덕’을 지명 뒤에 붙여 '몽마르뜨 언덕'이라고 부르더라도 크게 이상할 일은 없겠다.
실제로 몽마르뜨 언덕에서 파리를 내려다보면, 몽마르뜨가 파리에서는 가장 높은 지역이라는 것과, 파리가 아주 넓은 평지에 자리 잡은 거대한 도시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 산이란: 산의 사전적 개념은 ‘산은 해발고도 개념을 사용하여 평지나 구릉과 같은 주변지역보다 높은 자연지형’ 또는 ‘산은 일반적으로 육지에서 주변 지면보다 수백 m 이상 높고 복잡한 기복을 가진 지형'을 말한다. 하지만 이들 두 문장 모두 높다는 것의 기준이 별도로 정의되어 있지는 않다. 따라서 세계 각국은 '산'의 높이와 관련된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경우는 해발고도 1,000피트(약 305미터), 영국은 해발고도 2,000피트(약 610미터)를 기준으로 산과 구릉지를 구분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그 기준이 조금 더 세부적인데 '해당 지역의 면적 중에서 80% 이상이 해발고도 600미터 이상이면서, 최저점과 최고점의 고도차가 400미터 이상인 지형'을 산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에 반해 산에 대한 한국의 법률적인 개념은 매우 포괄적이다. 산림청의 산지관리법에는 ‘산지는 입목이 생육하는 토지이며, 보전산지와 준보전산지를 합한 필지단위의 임·경지의 전체 면적을 말한다’라고 규정하고 있고 산림자원의 조성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서는 ‘산지는 살아서 서있는 나무(입목, 立木)이나 대나무(죽, 竹)가 집단적으로 생육하고 있는 토지’로 정의하고 있다. 이 두 개의 법률은 산을 정의한 것이라기보다, 숲을 정의한 것으로 보일 여지가 크다.
19세기 전반기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서기 272년에 성(聖) 도니와 2명의 제자가 이곳에서 순교하였고, 12세기에는 베네딕트파의 수도원이 몽마르뜨에 건립되었는데 그 수도원의 일부인 생피에르 성당(Paroisse Saint-Pierre de Montmartre)이 사크레쾨르 성당의 서쪽에 아직도 남아있다.
몽마르뜨는 과거에는 [파리 최후의 마을]이라고도 불일만큼 전원적인 지역으로 유명했다. 역사적으로 몽마르뜨가 파리시의 한 구역으로 편입된 것은 1860년의 일이다.
프랑스혁명 시기에 와서 몽마르뜨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장소를 제공하였다. 1848년의 2월 혁명(1830년의 7월 혁명을 통해 왕위에 오른 ‘시민의 왕’ 루이 필립(Louis Philippe)의 왕정을 붕괴시킨 혁명)의 정치집회가 몽마르뜨에서 있었고, 1871년에는 파리코뮌(Commune de Paris)(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서 사회주의적 자치를 목적으로 수립된 정부)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880년대부터는 인근 지역에 물랑루즈(1889년 개장)와 같은 카바레가 들어서고 점차 환락가가 조성되었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사크레쾨르 성당(Basilique du Sacré-Coeur)은 1871년에 프랑스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 Franco-Prussian War, 프로이센의 지도하에 통일 독일을 이룩하려는 비스마르크의 정책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나폴레옹 3세의 정책이 충돌해서 발생한 전쟁)에서 패한 후, 가톨릭 신자들을 중심으로 건립이 추진된 성전이다.
당시 신자들은 조국인 프랑스의 미래를 위해 몽마르뜨의 정상에 성당(바실리카, basilica)을 건립할 것을 발의하였고, 국민의회는 새롭게 건립되는 이 성당을 국가의 공공건물로써 건축하는 것에 대해 찬성했다. 1876년 착공하여 약 38년 후인 1914년에 봉헌되었는데, 이 성당의 건립을 위해 당시 약 4천만 프랑의 국민 헌금이 모금되었다고 한다.
몽마르뜨는 근대 예술에 있어서 유명 예술가들의 활동 무대로도 유명하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자유의 활기가 넘치고, 카바레와 환락가가 조성되어 있는 이곳으로 젊고 유능한 화가들과 음악가들, 문학인들이 모여들었다.
프랑스의 정치적 격동기가 거의 끝난 1871년부터 세계 제1차 대전이 시작되기 전인 1914년 사이 몽마르트는 근대 문화예술의 전성기를 맞아 수많은 예술가들과 문학인들이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모델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화가를 만나는 일이나, 밤늦도록 카페에 앉아 토론을 나누다가도 종이를 끄집어내어 무언가를 긁적거리는 문학인을 목격하는 일은 그 당시 몽마르뜨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벨 에포크](belle époque, ‘좋은 시기’라는 뜻, 연도로는 1871에서 1914년 사이, 세기로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이 좋은 시기의 작품들은 화려하면서도 풍요로운 벨 에포크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건축물로는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한 1889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장에 세워진 에펠탑과, 그로부터 11년 뒤인 1900년(1900년 4월 15일부터 11월 5일까지)에 다시 개최한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건설한 알렉상드르 3세 다리 등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벨 에포크 시기의 작품들이다.
특히 이 시기의 건축과 미술, 패션과 건축에서는 화려한 장식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예술’이란 뜻의 아르누보 양식(Art Nouveau, 1890년에서 1910년에 유행한 양식)을 엿볼 수 있다.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비교적 빨리 이곳에 자리를 잡았던 베를리오즈와 하이네 등이 있고 클로드 모네와 오귀스트 르누아르, 고흐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과 에밀 졸라, 마르셀 프루스트와 같은 소설가들이 벨 에포크 시기에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19세기 후반 이래 수많은 화가들과 시인들이 흘러든 몽마르뜨는 인상주의, 상징주의, 입체주의와 같은 근대 예술과 문학의 발상지를 이루다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점차 파리 14구역에 있는 몽파르나스로 그 역할이 옮겨가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문화예술분야에서의 유명세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하였지만 몽마르뜨의 정상에 세워진 사크레쾨르 성당은 관광지로서만이 아니라 순례자의 성지로서도 발길이 이어지고 있으며, 물랭루주와 같은 전통적인 카바레와 19세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옛집과 거리가 남아 있어 아직도 많은 예술가들과 문학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몽파르나스(Montparnasse)는 파리의 남부 14구에 있는 한 지역의 이름이다. 지명에는 '산'을 뜻하는 'mont'가 들어가 있지만 몽마르뜨와 달리 언덕이나 구릉을 찾아볼 수 없다. 17세기까지는 이 지역의 지형이 주변에 비해 약간 높았기에 ‘파르나소스산(몽파르나소스, Mont parnassos)’이란 이름으로 불렸지만, 이후 파리가 성장함에 따라 대로를 만들기 위해 언덕(산)은 평탄화되어 사라지고 현재와 같이 이름으로만 'mont'가 남게 되었다.
몽파르나스는 20세기까지도 파리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였다.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을 쓰면서 소설 속 파리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모델을 몽파르나스 주민들로 삼았을 정도로라고 한다.
몽파르나스는 1860년에 몽마르뜨와 함께 파리시로 편입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몽마르뜨의 뒤를 이어 외국인들과 문화예술가들의 중심 지역으로 성장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몽파르나스의 전성기는 1900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인 1939년까지, 약 40년 간으로 볼 수 있다.
1909년부터 1912년까지 레닌이 이 지역에 머물면서 혁명을 논하고 구상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이후로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몽마르트를 빠져나와 그 당시 신시가지였던 몽파르나스로 몰려들었다. 1920년대에는 모딜리아니와 샤갈, 피카소와 칸딘스키, 고갱과 마티스, 아폴리네르와 헤밍웨이, 스트라빈스키 같은 위대한 예술가와 문학인들이 이 구역에 자리를 잡거나 이 일대 카페의 단골손님이 되면서 몽파르나스는 예술가들과 혁명가들의 정신적 고향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몽파르나스에서 활동한 이들 '파리파(派)'를 에콜 드 파리(École de Paris, 제1차 세계대전 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파리의 몽파르나스를 중심으로 모여 활동하던 외국인 예술가들의 집단)라고 부른다.
특히 바뱅(Vavin) 교차로 주변에는 에콜 드 파리가 즐겨 찾던 카페들이 모여 있다. 이들 카페에서는 '파리파' 예술가들이 예술과 인생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렸으며, 이를 통해 새롭고 혁신적인 예술사조를 창조해 내었다. 몽파르나스 3대 카페인 ‘Cafe Le Dôme(카페 르 돔)’, ‘Cafe La Rotonde(카페 라 로통드)’, ‘Cafe Le Select(카페 르 셀렉트)’은 현재까지도 남아 그 전통을 이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