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파리의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20. 파리의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1. 퐁네프의 연인과의 만남

퐁네프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1992년에 국내에 개봉된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Les Amants du Pont-Neuf)]을 통해서이다. 물론 영화를 보기 오래전부터 이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의 시에 나오는 미라보 다리와 함께 ‘파리의 가장 낭만적인 다리’ 정도로는 알고 있었지만, 스크린에 걸린 퐁네프의 연인들은 퐁네프라는 파리의 다리를 좀 더 강렬한 인상으로 가슴에 남게 하였다. 그렇기에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을 본 것이 퐁네프를 ‘처음’으로 알게 된 때라고 말해도 좋은 것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어쨌든 영화를 본 그날부터 센강의 다리 퐁네프는 '언젠가는 가봐야만 하는, 꼭 그래야만 하는' 파리의 한 풍경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은 퐁네프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곡예사인 한 사내와 시력을 잃어가는 무명의 한 여자 화가의 운명적인 만남과 사랑을 그린 영화로 레오 카라(레오스 까락스, Leos Carax, Alexandre Oscar Dupont)가 감독을, 쥘리에트 비노슈(쥴리엣 비로쉬, Juliette Stalens Binoche)가 여자 주인공인 미쉘을, 드니 라방(Denis Lavant)이 남자 주인공인 알렉스를 맡아 제작된 작품이다.


사실 이 영화는 내용 이전에 그 제목에서 의구심을 자아내었다. ‘연인들’이라니, ‘연인들’이라면 퐁네프를 배경으로 여러 연인들의 다양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영화여야 하는데, 실제로는 알렉스와 미쉘이라는 한 커플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만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무슨 이유로 ‘연인들’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단 말인가.


사전적으로 보자면 ‘연인’이라는 단어에는 ‘서로 연애하는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을 뜻하는 복수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에 알렉스와 미쉘만이 주된 주인공이라면 [퐁네프의 연인]이라고 해야 옳은 것이 아닌가.

물론 원 제목인 [Les Amants du Pont-Neuf]을 보게 되면 연인을 뜻하는 프랑스어 명사인 ‘Amant’의 복수형인 ‘Amants’를 사용하고 있으니 퐁네프의 연인들이란 번역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퐁네프의 연인]이란 번역에 한 표를 던지게 된다.


사정과 상관없이 이 영화는 몇 번을 보고 또 봤던, 그래도 좋았던 영화였다. 그것은 평소 좋아하던 ‘프랑스 영화’였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영화의 앞부분에 나오는 알렉스와 미쉘의 모습이 파리라는 낭만적인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인 점도 한몫을 하고 있다. 일종의 '문화적 충격'을 이 영화에서 받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특히 알렉스의 모습이 마치 실제 거리의 부랑자를 데려다가 촬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로 지저분하였기에 어떤 면에서는 괴기스러움마저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알렉스와 미쉘을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커플’이라 평하는 이들도 있는 것이다.


퐁네프의 연인들이란 제목만으로 보면 영화는 파리의 센강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커플(들)의 낭만적인 사랑이야기가 스크린을 수놓을 것 같아 보였다.

그것이 아니라면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의 세 가지 색깔을 상징으로 삼은 영화 [세 가지 색(TROIS COULEURS)] 시리즈인 [세 가지 색 : 블루(TROIS COULEURS : BLEU)]와 [세 가지 색 : 화이트(TROIS COULEURS : BLANC)], [세 가지 색 : 레드(TROIS COULEURS : ROUGE)]에서처럼 진한 사회성이나 상징성을 영화의 전반에 깔고 그 위에 남녀 간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이별 이야기를 담은, 어쩌면 당시 우리네의 정서로는 감당하기에 조금은 벅찰 수도 있는, 그렇기에 ‘파리라서 가능한 이야기’라고 여겨야 할 수 있는 영화를 상상했던 것 같다.


물론 [세 가지 색] 시리즈 영화는 1994년에 개봉되었기에 [퐁네프의 연인들]이 개봉된 1992년에는 그 영화들을 아직 본 것은 아니었지만, 파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면, 당시 매년 프랑스 문화원에서 개최하던 프랑스 영화제에 걸렸던 다른 영화들처럼 그런 식의 '프랑스 다운' 영화여야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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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은 헝가리의 작곡가인 졸탄 코다이(Zoltán Kodály)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 곡의 강렬한 연주와 함께 시작한다. 낮은 음역과 높은 음역을 넘나드는 강렬한 현의 공명과 함께 파란빛의 조명이 흐르는 지하 차도를 빠져나온 카메라의 시선은 밤 불빛이 어른거리는 센강과 어두운 파리의 밤거리를 누군가의 시선으로 훑고 지나간다.


시련의 아픔에 시력까지 잃어가는 무명의 화가 미쉘은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여 거리를 방황하다가 보수공사로 인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퐁네프에서 알렉스를 만난다.

알렉스는 입으로 불을 뿜어 내는 ‘불 쇼’를 거리에서 공연하면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가난한 곡예사이다. 말이 곡예사이지 사실은 홈리스에 가깝다. 하지만 영화의 배경이 파리이기에 그런 알렉스에게 ‘거리의 행위 예술가’라는 꼬리표를 달아준다 해도 상관없겠다.


배경은 서로 다르지만 비슷한 처지에서 만난 두 사람은 마치 오늘이 최고이자 마지막 날인 것 같이 지독한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3년 후 크리스마스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헤어진다. 어쩌면 그 이별은 만나기 전부터 예정된 것인 양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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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하늘을 수놓던 화려한 폭죽의 소음과 퐁네프 위에서 그것을 바라보며 서로를 사랑스럽게 희롱하는 미쉘과 알렉스의 모습은, 지독한 사랑에 빠진 퐁네프의 연인에 대한 낭만적인 되새김질을 일으키게 하는 원천이다.


기억도 가물할 만큼 여러 해 전의 언젠가, 영화 속에서 본 퐁네프가 그 자리에서 나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기를 꿈꾸며 파리에 발을 디뎠었다. 하지만 그때의 퐁네프는 수많은 관광버스와 차량의 소음에 뒤덮인 파리의 한 다리일 뿐이었다.

“여기가 쥴리엣 비로쉬와 드니 라방이 불꽃같은 연기를 펼쳤던 바로 그 퐁네프라고?”

“대체 영화 속의 그 퐁네프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분명 내가 놓친 무엇인 가가 있을 거야.”

현실의 부정은 퐁네프를 몇 번 더 찾아야만 하게 만들었다.


영화 속 퐁네프는 실제 다리가 아닌 거대한 세트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다소 착잡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거대한 규모의 퐁네프를 세트장으로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해서 전문 건축가와 조각가뿐만이 아니라 엄청난 인원과 물량이 영화의 촬영에 동원되었다고 하니, 영화 속 퐁네프의 부재가 단지 '트릭'에 의한 눈속임이 아니라 '매직'에 의한 환상이었다는 것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


결국 존재하지 않는 '영화 속의 퐁네프'가 존재하는 '현실의 퐁네프'를 더욱 아름다운 명소로 만들고 있든 것이다. 팔짱을 끼고 퐁네프를 걸어가고 있는 연인의 모습에서 미쉘과 알렉스의 영화 같은 사랑을, 어둠 내리는 센강의 붉은 노을의 낭만적인 폭죽 속에서 더듬게 된다.



때 맞춰 삶의 영화 한 편을 읽는다


1.

시놉시스도 주어지지 않고

플롯도 짜여 있지 않으니

종 잡을 길이 없다


지금까지 무엇을 상영한 것인지

결말이 있기나 한 것인지

어느 것 하나 알 길 없는 영화가

스크린에 걸려 있다


무수한 삶의 순간들은

스쳐가는 장면과 장면일 뿐이다


2.

새 필름 뭉치가 영사기에 걸리려나 보다

물 때를 기다려 갯벌로 나가는

바닷가 마을의 아낙처럼

마음이며 걸음이 바빠진다


이윽고 필름이 돌아가고

빛의 입자가 쏟아져 달린다

제목도 모르고 내용도 모르지만

지금이 바로 그때이고

이 자리가 바로 그 자리임을

짐작으로 알아차린다


스크린을 메운 이 영화가

나의 삶에서 마지막 상영작이기를

검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외줄기 불빛 같은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그래, 때 맞춰 이 자리에 앉았으니

이젠 그것을 읽어낼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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