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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가정환경과 랭보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과 랭보

                        

‘바람 구두를 신은 시인’, ‘스스로 시를 정복해 버린 천재 시인’ 랭보의 영향은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와 같은 문학에만이 아니라 예술 및 문화 전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랭보의 문학과 삶을 이해하려는 것은 어쩌면, 불가해한 것을 기어이 받아들이려는 짓과 같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랭보를 알아가기 위해서는 그가 걸어간 길을, 그의 발걸음이 찍어 놓은 행적을 검은 활자를 통해서라도 따라나서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랭보가 걸어갔던 길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나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수 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삶을 느낌 닿고, 관심으로 이어지는 것들을 어찌어찌 찾아 줄여서 정리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보다 자세한 것은 이어서 출간할 예정인 ⟪바람 구두를 신은 천재시인 랭보의 삶과 시, 그리고 죽음⟫편에서 자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여기에서 다루려는 것들이 진정 [스스로 시를 정복해 버린, 조숙했던 천재 시인 랭보]를 제대로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가진 편향된 눈빛과 사고가 랭보의 삶과 문학에 더해져 버린 것을 제대로 구분해 낼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긴 시간이다. 랭보가 나의 삶과 글에 들어온 것이.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랭보라는 시인을, 스스로 시를 정복해 버린 조숙했던 천재 시인 랭보를, 열여덟의 캠퍼스에서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이젠 늦어 버렸다. 되돌리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버렸다. 뒤돌아가기엔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

“그는 푸르른 그 시절을 갈 빛으로 서걱거리게 만들었지만 그때는 그 서걱거림의 의미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지만 이젠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결국 펜을 잡는다. 긴 여정이 될 것 같다. 랭보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그래도 그 길에 오른다. 긴 길이란, 생각할 것이 많은 길일뿐이다. 그의 뒤를 좇는 것은 랭보를 만난 이에게 주어지는 사사로운 의무일뿐이다. 

누군가에 대한 기록이 모두 그렇듯이 어찌되었건 이야기는 랭보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시작된다.



랭보의 가정환경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Jean Nicolas Arthur Rimbaud)는 1854년 10월 20일에 프랑스 아르덴주의 소도시인 샤를빌(지금의 샤를빌메지에르(Charleville-Mézières))에서 직업 군인이었던 아버지 프레데리크 랭보(Frédéric Rimbaud, 1814–1878)와 시골 출신의 어머니 비탈리 랭보(Marie Catherine Vitalie Rimbaud,  1825-1907) 부부 사이에서 두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랭보가 어릴 때부터 랭보의 아버지는 주둔지 이동이나 전쟁 참여와 같은 직업상의 이유로 인해 집에 거의 머물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거기에 더해진 랭보 어머니와의 성격 차이로 인해 결국에는 집을 완전히 떠나 버려 랭보는 ‘아버지가 있긴 하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가정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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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랭보의 아버지인 프레데리크 랭보(Frédéric Rimbaud, 1814–1878)는 프랑스군의 보병 장교(French infantry officer)로 근무하며 알제리아 정복(conquest of Algeria)과 크림전쟁(the Crimean War) 등과 같은 제국주의 전쟁에 참전하였다. 군인이라는 직업의 특성 상 집에 거의 머물지 않다가 랭보가 어릴 때 집을 완전히 떠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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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의 아버지가 집을 떠난 것에 대해 “드센 성격의 아내가 싫어 집을 떠났다”라고 말하는 기록들도 있다. 하지만 부부가 갈라서는 것에 대해 남편과 아내 어느 한 편에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경우보다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서로간의 문제가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점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랭보의 아버지인 프레데리크 랭보 또한 가장으로서 자신의 가정을 끝까지 지키지 않았다는 것과, 그의 자식들에 대한 양육의무를 저버린 것에 대한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순탄치 않은 가족사로 인해 어린 시절의 랭보는 차갑고 고집이 센 홀어머니 밑에서 ‘과도하리만큼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성장해야만 했다. 이에 대해 어머니의 가정교육 방식을 ‘전통적인 가톨릭 방식의 교육방식’이라고 표현하는 문헌들이 있는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녀가 자녀들에게 행한 것은 가톨릭 방식의 교육이라기보다는 ‘그녀의 주관을 기반으로 그녀의 성격이 반영된, 그녀가 가톨릭식이라 믿는 그녀만의 양육방식’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게다가 그들 자료에서는 그녀의 양육방식을 그냥 ‘교육‘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교육은 가정에서의 양육방식의 일환일 뿐이지 결코 교육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백번 양보한다 해도 그녀가 그녀의 자식들에게 한 것은 ’그녀가 가장으로서 전권을 가진 그녀 식의 가정교육‘ 정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는, 랭보 어머니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보병 장교로 직업 군인이었던 남편은 늘 집을 떠나 있다가 결국에는 가정을 버리고 떠나 버렸고, 격동의 역사 속에서 여자의 몸으로 혼자 아이들을 돌보며 가정을 꾸려야만 했으니, 시골 출신에 배움이 짧은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양육방식이 전통적인 가톨릭 교육방식이며 그것이 최선이라고 믿었을 것이고, 또한 그 방식만이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가정환경과 어머니의 일반적이지 않은 양육방식은 어린 랭보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임을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어쨌든 랭보 어머니의 가정교육을 결코 가톨릭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가톨릭에서만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 전통을 따른다면 그녀는, 가장이자 남편인 프레데리크 랭보에게 순종했어야 했으며 그와 크게 대립하는 일은 없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성격은 그렇지 못했기에, 그로 인해 랭보의 아버지 프레데리크가 가정을 저버리는 이유를 제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그녀의 교육 방식을 ‘엄격한 가톨릭방식’이었다고 기록한 자료들에 대해서는, 그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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