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으로 인간의 이중성을 그려낸 화가 카라바조

카라바조의 삶과 작품 그리고 죽음

빛과 어둠으로 인간의 이중성을 그려낸 화가 카라바조


“빛은 인간이 지닌 이중성의 근원이다.”


빛과 어둠의 강렬하면서도 극적인 대비는 인간의 이중성을 완전히 벌거벗겨 놓을 듯하다.

낮의 밝음과 밤의 어둠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피조물에게 주어진 운명이기에, 그것의 원인이 신에게 있건 자연에 있건, 인간의 심사는 애초부터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비록 이중성이 인간의 본능이긴 하지만 인간의 이중성은 어떤 하나의 현상만을 따르고 있지 않아 인간 스스로는 자신의 이중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자연계를 살아가는 인간은 자연계의 법칙을 거스르려는 본능을 지닌 유일한 존재이다.”


인간의 신경이 인지할 수 있는 ‘형상’이란, 자연계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해, 그 순간에 발현되어 있는 ‘경계의 형태’를 감각이 읽어 낸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감각이 읽은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그 사물의 온전한 형상’이라고 단정 짓는다면 ‘일반화의 함정’에 빠져 예기치 않은 오류를 발생시킬 우려를 낳게 된다.


인간에게 있어 ‘없는 것’(無)과 ‘있는 것’(有)이란, 신경이 인지할 수 있는 [임계점](threshold point)을 기준으로, 정량적이거나 정성적인 정도의 차이를 극과 극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인간이란, 비록 ‘있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자신이 설정한 임계점을 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없는 것’이라 치부하려는 경향을 지닌 미완의 존재이다.

인간에게 있어 ‘없는 것이란, 있기는 하지만 인지력의 임계점을 넘지 못하는 것’의 다른 이름일 때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계에서는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것이라 해도, 인간은 오직 자신의 인지력만이 유와 무를 결정짓게 되기에, 인간에게 있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 ***


“카라바조의 작품 앞에 서면, 지금껏 살아온 세상과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 낸, 셀 수 없을 만큼이나 무수한 임계점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카라바조는 어둠과 밝음의 극적인 대조를 이용하여 드라마틱한 효과를 그림에 불어넣은 [명암법](Chiaroscuro, 키아로스쿠스)과 그것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테네브리즘](Tenebrism)의 대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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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의 나르시소스, Narcissus, Rome, Italy(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Palazzo Barberini) (Disputed), c.1599


빛과 색, 붓이라는 오브제를 도구 삼아 캔버스라는 작고 좁은 이차원의 공간을 자유로이 유영한 카라바조 그림에서의 어둠은 결코 날을 세운 날카로운 경계를 만들어 내질 않고, 시나브로 스러져 가다가 부지불식의 어느 지점에서부터 밝음을 향해 점차 나아가고 있기에, 색의 입자 하나하나를 아무리 세밀하게 더듬어 쫓더라도 그 터닝 포인트를 찾아내지 못하게 될 수 있다.


“카라바조의 그림에서의 색은 빛을 담은 미로일 수도 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살아가는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적인 사람라면, 변화는 어느 한순간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변화는 자신의 곁에 늘 있어 온 것인데도 막상 임계점을 넘어서기 전까지는 그것을 변화라고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누군가 “변화가 한순간에 갑작스럽게 찾아왔었다.”라고 말을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주변에 잔뜩 늘려 있던 변화의 낌새를 외면하며 버티다가, 또는 그것을 인지하지 않으려고 애써 버둥거리다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때에 가서야 “갑작스러운 것이었다.”는 말로써 자신의 무책임함을 덮으려는 변명일 뿐이다.


“카라바조는 그의 작품 속에 어둠과 밝음의 변화를 한 가득 풀어놓았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늘 새로운 흥밋거리를 더듬어 찾을 수 있게 된다.”


눈을 앞으로 당겨 세밀하게 살펴보면 물감의 한 입자 곁에 붙어 있는 또 다른 입자마다에서 그 변화를 느낄 수 있지만 조금 떨어져서 전체를 놓고 보게 되면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 임계점이 어디인지, 언제 어디에서 그것의 명도와 채도가 변하기 시작한 것인지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어둠과 밝음이란, 입자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현상이 아니라 무수한 입자가 함께 어우러져 발현하는 지극히 연속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 ***


카라바조의 작품을 감상하는 날이 길어지고, 그것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깊어지다 보면 깨닫게 된다. 그가 그림 속에 풀어놓은 검정은 결코 ‘검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물감의 색’이 아니라 ‘화가 카라바조의 영혼의 색’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카라바조의 그림을 통해 미술은 ‘인간에, 인간을 위한, 인간만의 영적 행위’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는 것을.


카라바조의 영혼의 색인 검은색은 [블랙](Black)이 아니라, 밝음을 묵묵히 떠받치고 있는 [수행원으로서의 블랙](Black as Servant)이며, 무대 아래에서 빛의 화려한 공연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연출자로서의 블랙](Black as Director)이라 할 수 있다.


카라바조의 블랙은 또한 밝음과 대비를 이루어 카라바조가 작품을 통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 강하게 전달시키는 [전달자로서의 블랙](Messenger Black as Messanger)이기도 하다.


카라바조의 블랙에 그의 불가해하고 지난했던 삶을 이입시키면 ‘천재로서 지독한 고독’을 동반자 삼아 살아가야만 했던 현실에서의 무수한 죄악이, 검게 박제된 채로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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