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로부터 또는 무엇인가로부터,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렇지만 혼자서만 견뎌야만 하는 커다란 아픔을 겪었던 사람은, 그것에게서 받은 상처가 내면 깊숙이 박혀 있기에, 아무리 그것을 숨기려고 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될 짓을 무질서하게 마구잡이로 저지른다든가, 분명 그래야만 하는 것인데도 아무런 이유 없이 회피하려고 하는 것과 같이, 이성적이라고 할 수 없는, 그래서 이해하기 힘든, 거칠고 난폭한 행위에 때때로 연관될 때가 있다.
아마도 조금만 자세하게 들여다보게 되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 대부분의 내면에서는 이런 상처가 새겨 놓은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 겪었던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은 카라바조에게 씻어낼 수 없는 정신적 외상을 입혔고, 강해야 한다는,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강박관념이 남자인 그를 거칠고 난폭하게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또한 그로 인해 발생한 트라우마가 그의 삶 전반을 지배하면서 카라바조의 사회적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카라바조는 결국 명성이 자자한 거장으로서의 삶과 시정잡배와 같은 삶을 이중적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것이 어떤 연유로 발생한 것이건 간에, 토마소니가 카라바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1606년의 그날, 카라바조의 트라우마는 자신만의 심리적 외상을 넘어, 그를 죽음을 실행한 난폭한 살인자의 이름으로 기록에 남겨지게 만들었다.
그날에 있었던 사건은 카라바조의 인생을 통째로 흔들었고 이제 그는 그때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진 인생의 행로에 어색한 걸음을 내디뎌야만 했다.
또한 그날의 사건 이후 더욱 심해진 카라바조의 심리적 불안정성과 정신적 충동성은 그의 작품 전반을 통해 죽음에 대한 모티브를 더욱 사실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묘사하도록 이끌었다.
그런 점에서 그날의 사건은 화가 카라바조가 더욱 ‘카라바조다운 작품’을 남기게 되는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어떤 것에 있어서는, 행여 그 시점에는 그것이 부정적으로 보인다고 해도 반드시 부정적인 것에만 연관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카라바조의 삶뿐만이 아니라 내면까지 뒤흔들었던 그날의 사건은 그의 정체성에도 변화를 주었고 결국에는 그의 화풍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로서 카라바조의 그림에서는 한 차원 더 높아진 그의 사상과 페르소나를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도피생활 중에 있었던 화풍의 변화는 결국 여기에서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취향의 문제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시기 이전에 그려진 작품들보다는 이 시기에 그려진 작품들에게 더욱 눈길과 마음이 간다.
그것들에게서는 더욱 성숙된 빛과 어둠이, 카라바조의 은밀한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 같다.
살인 사건으로 인해 시작된 그의 도피생활에 대해서는 "카라바조니깐 그렇게 하고도 남았을 거야."라는 식의 각종 추측들이 사실과 뒤엉킨 채 기록이란 이름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어떤 것들은 소설을 쓴 것이라고 할 만큼 억측이 구구하다.
기록이란 것은,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고 있던 이야기를 모아 텍스트로 남긴 것일 수 있다.
따라서 ‘분명 그러했던 것’만이 그 텍스트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출처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생각과 어느 정도 부합되는 것과, 어떤 끌림을 느끼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마치 사실인양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인간이 지나간 것을 인식하는 방법’이다.
그 방법은 카라바조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동작하고 있다. 카라바조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기록된 자료들을 넉넉한 시간을 갖고 뒤적여야 한다.
하지만 사람은, 그가 비록 미술 애호가라고 하더라도 그 또한 일반 대중의 한 사람에 불과하기에, 그 과정에서 접하게 되는 가십거리들에게 ‘기록’이란 검은 글자가 박힌 꼬리표를 달아 붙이기 십상이다.
원래 가십거리란 것들은 학교 앞 문방구점에서 팔던 불량과자들처럼 빛깔 좋고 향 좋고 달콤하기 마련이다.
인문학과 예술의 저잣거리 좌판에 잔뜩 늘려있는 ‘카라바조에 대한 천박한 텍스트’들은 그렇게 해서 생겨난 불량과자들과 다를 바 없다.
그들 것을 섭취한 일부 대중은 ‘천한 인문학자’ 내지는 ‘천한 예술학자’가 되어 또 다른 대중을 현혹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은 저잣거리 곳곳에서 마치 자신이 길거리 전도에 나선 ‘인문학과 예술의 전도사’가 된 것 마냥 행세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일반 대중은 그들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일반 대중은 학교 앞 문방구점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과 같아서 오히려 그들의 가벼운 이야기에 두 눈을 반짝이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을 수도 있다.
또한 한 가지 더 주의해야 할 점은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기록들에게서도 서로 내용이 어긋나는 텍스트들이 찾아지기에, 자칫 섣부른 판단을 하게 된다면 ‘왜곡이 사실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방조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잘못된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수 있다.
인간이란 사실이기에 그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믿고 싶은 것이기에, 그것이 자신의 인지능력으로 받아들일 만한 것이기에 사실이라고 믿는, 이상하고 별난 능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살인사건과 그에 따른 참수형의 선고로 인해 카라바조는 서둘러 로마를 떠나 나폴리로 도피하였다.
그의 도피 과정에는 화가 카라바조의 재능을 아끼는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의 적극적인 비호가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도피생활과 그들의 비호는 카라바조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도피생활 중에도 카라바조는 교회의 제단을 장식할 성화를 계속해서 의뢰받았다.
카라바조는 멈추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카라바조는 그림만이 자신에게 부여된 신의 소명이고,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카라바조에게 그림과 신앙은 하나였다.
그는 기도를 하듯 그림을 그렸다.
성직자와 교회의 의뢰를 받아, 귀족과 지역 유지의 의뢰를 받아, 그리고 자신의 구명활동을 위해서, 카라바조의 손끝에는 언제나 붓이 쥐어져 있었다.
아무리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하였다고 해도, 카라바조는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이 인정하고 로마에서만이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에 명성이 자자한, 예술적 소양이 있는 재력가라면 누구나 그의 소장하고 싶어 하는 당대 최고의 화가였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도피 기간 중에 카라바조가 그린 작품에서는 한 순간 부와 명성으로부터 떨어져 도망자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의 처지에 대한 절망감과 영원의 도시 로마를 향한 갈망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