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만나게 되는 세 가지의 페르소나

영화와 가면 그리고 페르소나

영화에서 만나게 되는 세 가지의 페르소나


오늘날에 와서 페르소나의 개념은 심리학과 정신분석학 그리고 인문학 분야에서뿐만이 아니라 예술과 문화산업 분야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적용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영화산업과 같은 영상문화 분야에서는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영화산업에서 페르소나의 개념은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의 관점의 접근을 통해 찾아볼 수 있으며 영화에서 만나게 되는 이런 다양한 형태의 페르소나들로 인해 관객은 영화의 영상 속으로 더욱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 영화감독의 관점에서의 페르소나

• 배우의 관점에서의 페르소나

• 관객의 관점에서의 페르소나


영화를 관람하면서 이러한 페르소나를 하나씩 찾아내고 그것들 각각에 빠져들게 되는 것은 오직 영화의 관객만이 경험할 수 있는 매력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들 세 가지 페르소나 각각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영화감독의 관점에서의 페르소나

감독의 개성과 독창성이 중요시 하고 있는 ‘작가주의 영화’의 촬영과 제작에 있어서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에서부터 배우의 캐스팅, 각 배우들과 스태프들에 대한 역할의 분배 및 음악의 선정과 소품의 선택, 그리고 촬영과 편집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제작과정 전반에 있어 광범위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작가주의 영화’라는 용어에서의 ‘작가’는 통상적인 개념에서의 작가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작가주의 영화에서 말하는 '작가'란 전통적인 역할에서의 작가(각본을 쓴 시나리오 작가)가 아니라 영화의 제작과정 전반을 관리 및 지배하고 있는 ‘영화감독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특히 ‘작가주의 영화’의 제작에 있어 영화감독은 자신의 영화관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것을 영상으로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특정한 배우와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작품에 걸쳐 계속적으로 작업을 함께 하게 된다. 이때 그 배우는 그 영화감독이 영화의 영상을 통해 관객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을 영화감독의 입장에서 정확하게 전달하는 ‘영상을 지배하고 있는 영화감독의 외적 인격으로서의 페르소나’로서의 연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영화감독의 관점에서의 페르소나가 영화산업에 있어서는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페르소나의 개념이다.

배우의 관점에서의 페르소나

어떤 경우에는 영화를 관람한다는 것이 “특정한 배우의 연기에 완전히 빠져 영화에 몰입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특히 연기력이 아주 뛰어난 배우가 주연을 맡은 영화의 경우에는 “배우의 연기를 보러 영화를 본다.”고 할 정도로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해진다. 이런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은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그 배우가 극중에서 연기하고 있는 등장인물의 정체성과 그 배우 자체의 정체성을 혼동하게 되는 즐겁고 매력적인 상황에 빠져들게 된다.


이와 같이 배우의 연기력이 영화의 전반을 지배하는 경우, 그 배우가 연기하고 있는 극중의 인물이 그 배우의 페르소나인지, 그 배우가 극중 인물의 페르소나인지에 대해서 관객이 질문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배우라고 하더라도 자신과 잘 맞아 떨어지는 작가와 감독, 촬영진 및 그것을 알아봐줄 수 있는 높은 안목을 가진 관객을 만나지 못하다면 그의 연기는 한낱 잡스러운 잔재주에 불과할 수도 있게 된다.

촬영이 시작되면 배우는 다음과 같이 다중적인 외적 인격으로서의 페르소나를 연기하게 된다.


• 감독의 페르소나로서의 연기

• 작가의 페르소나로서의 연기

• 극중 인물의 페르소나로서의 연기

• 자기 자신의 페르소나로서의 연기

• 관객의 페르소나로서의 연기


배우가 이와 같은 연기력을 갖는다는 것은 배우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진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배우의 타고난 연기능력을 기반으로 세월의 숙성작용과 배우의 피나는 노력이 더해져야만 가능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어찌되었건 관객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관람하고 있는 영화의 주연 배우가 이런 다양한 형태의 페르소나를 완벽하게 연기하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세상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이나 강렬하게 그 영화에 빠져들게 된다는 의미일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관객이란 영화관의 좌석에 앉아 스크린에 조사된 불빛을 바라보기만 하는 ‘대중 관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며 즐길 줄 아는 제대로 된 관객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 가지 색 포스터.JPG

영화 세 가지 색: 레드, 화이트 블루

작품마다 다른 여주인공을 등장시키고 있는 영화 [세 가지 색] 시리즈는 감독인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Krzysztof Kieslowski)의 서로 다른 페르소나들을 만나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일반적으로 작가주의 연화감독의 경우 특정한 한 사람의 배우와 여러 편의 작품을 함께 작업 하지만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시리즈에서는 그렇지 않다. 일반적이지 않은 이러한 점이 이 작품들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고 있을 수 있다.

이 작품들 각각에서는 주인공 역할을 맡은 각각의 여자 배우들이 자신과 영상 속의 캐릭터들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 냄으로서, 누가 영상의 주인공이며 누가 현실에서의 배우인지를 관객이 알아차릴 수 없게 만든다. 시리즈 전체를 관람한 관객이라면, 남자이든 여자이든, 영상을 통해 발현된 다양한 페르소나들을 통해 작가와 감독, 배우의 외적 인격들과 교류를 하게 되고, 결국에는 관객 자신 또한 현실의 세상과 영상 속의 세상 속을 부유하게 된다.



영화관객의 관점에서의 페르소나

영화의 관객들 또한 그들이 관람하고 있는 영상을 통해서 ‘스크린에서 나의 페르소나’를 만나볼 수 있게 된다. 관객들은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크게 만나게 되는 페르소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 자기 자신 페르소나

• 배우의 페르소나

• 감독의 페르소나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관객은 어두운 영화관에 앉아 있는 현실에서의 자신 이외에도 이들 세 가지의 페르소나를 만나게 되는 신비로운 상황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아마도 이러한 매혹적인 환경이 관객을 영화관으로 불러 모으는 이유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은 영화 속의 인물과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가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만들어낸 ‘스크린 상의 외적 인격’을 통해서 영화의 영상에 완전히 빠져들게 된다. 이런 몰입 상태에서 관객은 영상 속에 등장하고 있는 배우가 영화의 대본을 연기하고 있는 외적 인격으로서의 인물이 아니라, 배우 그 자체의 인격 또는 영화 속의 인물의 인격과 동일시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관객은 영화의 캐릭터에게 자신 또는 자신이 처해있는 현실에서의 상황을 투영함으로서 쾌감이나 비애, 카타르시스와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영화의 캐릭터를 마치 자신의 분신 또는 가면을 쓴 자신으로 여기게 되는 것에서 비롯되고 있다. “가면을 쓴다.”는 것과 “영화의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의 공통점은 ‘현실에서의 자신을 벗어난 또 다른 내가 되는 것에 대한 열망의 발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인간이 가진 이러한 은밀한 열망을 채워줄 수 있는, 비록 그것이 일시적일뿐이지만, 문화적 도구인 것이다.


드라마 또한 영화와 같은 영상문화의 일종이지만 오직 영화만이 이런 현상을 갖고 있는 것은 ‘영화관’이라는 독특한 관람 환경의 역할 때문이기도 하다. 어둠에 덮여 있는 높고 넓은 공간은 마치 하늘이 열려 있는 밤의 들판을 연상케 한다. 이런 환경 속에 앉아서 거대한 스크린에 조사되고 있는 영상을 동공을 넓혀가며 관람하는 것은, 그것이 작가와 감독 그리고 배우가 완벽하게 호흡을 맞춘 잘 만들어진 영화라면, 가면을 쓴 주술사가 어둠을 스크린 삼아 불빛의 춤사위를 수놓는 것을 응시하는 것과 같아서, 그것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그것으로부터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완벽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만날 수 있는 다양한 페르소나들 중에서 관객의 입장에서는 자기 자신 페르소나를 만나는 것에서 가장 깊은 상처를 받거나 가장 큰 환희를 맛볼 수 있게 된다. 현실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 대부분은 ‘자신의 현실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무엇’인가를 은연중에 또는 대놓고 원하고 있다.


Up where we belong, 자신이 속해 있는 곳보다 더 좋은 곳을 찾으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더 좋다.”는 표현의 모호함이 인간을 자극하고 있다. 문화는 인간을 자극하는 형이상학적인 현상이자 도구이다.

그래서 인간은 없는 문화라는 실체 없는 것에게 자신의 시간과 금전을 기꺼이 지불하는 것이다. 영화는, 인간이 영위하고 있는 그 어떤 문화보다 더 강하게 인간을 자극하는 현상이고 도구이다. 그래서 인간은 영화관을 향해 발걸음을 딛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가면을 쓰지 않아도 나의 페르소나를, 타인의 페르소나를 만나볼 수 있으니.



내적 인격이 자아인가, 페르소나가 자아인가

진실이란 것의 본질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것이 인간과 관계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혹시 누군가 그것에 대해 안다고 얘기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그 사람의 무지함이 일으킨 만용의 결과물일 뿐이다. 아마도, 어쩌면, 신조차도 그것을 모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페르소나를 통해 겉과 속이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다면적인 존재이다. 인간이 행여 이중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만큼 다행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흑과 백, 참과 거짓이라는 이중적 관계를 기반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경계를 정의할 수 없는 다면적 관계’를 기반으로 살아간다는 것보단 훨씬 편리함 일이라는 것을, 그것이 더욱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살아가는 진정한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라면 언젠가는 깨닫게 된다.


페르소나는 인간의 삶에 진실한 것과 거짓된 것을 뒤섞어 놓았다. 페르소나로 인해 인간은 어느 것이 진실이며 어느 것이 거짓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다.

추측컨대 페르소나는 태초의 혼동(케이아스, Chaos) 속에서 태어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모든 페르소나에는 혼동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어떤 페르소나의 붕괴는 태초의 빅뱅과 같이 내면의 붕괴를 격렬하게 일으키기도 한다. 하나의 페르소나가 붕괴되는 순간 인간은 길을 잃고 서성이게 된다. 이때 어떤 이는 그때의 그곳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되고, 어떤 이는 또 다른 페르소나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에는 그때의 그곳을 벗어나오게 된다.


자신의 내적 인격과 페르소나가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 인간은, 사회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나로 살아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페르소나가 태초의 혼동에서 온 것이라면 그 혼동의 책임은, 페르소나가 일으키고 있는 혼동의 책임은, 온전히 신에게 있는 것이기에 페르소나에 대한 탐구는 신의 영역을 기웃거리는 인간의 ‘월권행위’일 수 있다.


by 고일석(Dr. Franz KO)

본 글은, <<가면과 페르소나의 미학, 카라바조>>(출간 예정)의 초고 중에 일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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