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감상은 변덕이 죽 쑤듯 들끓기 일쑤라서 금방 이랬다가도 곧 저랬다 하고, 조금 전에는 이런 것 같아 보이던 것이 막상 지금은 저런 것 같아 보이는, 서로 다른 끝에 서있는 두 개의 면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오락가락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라는 인간의 모습이기에, 기웃거림 또한 우리의 자연스러운 한 모습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기웃거림이 변덕스러움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기웃거림은 인간을 변덕스럽게 만들게 된다. 그러면 이러한 기웃거림을 ‘우리는 왜 변덕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과 관련되어 몇 가지 궁금증이 이어져 나온다.
“우리를 이렇게 변덕스럽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고, 우리는 왜 변덕스러운 것일까.”
“인간의 변덕스러움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일까.”
인간에게서는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에 있어 완전히 서로 다른, 보기에 따라서는 하나의 극과 또 다른 하나의 극이라 할 수 있는, 두 가지의 측면을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을 이름 붙여 ‘양면성’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이중적인 생각과 이중적인 판단, 이중적인 행동의 발원지가 바로 인간의 양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변덕스러울 수밖에 없기에 이중적이고 이중적이기 때문에 변덕스러운 것이다. 다시 위에서 던졌던 질문에 부딪히게 된다.
“왜 인간은 이중적인 것일까.”
“인간 이중성의 원인은 대체 무엇인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지금껏 발견해낸 몇 가지 단서를 엮어 판단해보면 ‘인간의 이중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빛인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빛이 인간 이중성의 전적인 원인이라고 몰아붙일 수만은 없겠지만, 빛은 적어도, 인간의 이중성에 있어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빛에 있어 인간이 이미 익숙해진 방식은 우리의 사고 능력에 비해 훨씬 단순하다. 빛이 있는 상태에 '밝다'라는 표현을 붙이고 그렇지 않은 상태에는 '어둡다'라는 표현을 붙인다. 이 표현들에 따르면 어둠은 스스로에 의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빛에 종속된 하나의 부수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빛을 중심에 두고 '있다' 또는 '없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정논리(Positive Logic)'에 기반을 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본다면 정논리란 것은 눈에 보이는 것, 감촉으로 느껴지는 것 중에 가장 일반적인 상태를 ‘있음’으로 보고 그렇지 않은 상태를 ‘없음’으로 보는 논리의 표현방식이라 할 수 있다.
논리(Logic)란 것은 철학이나 수학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인식과 그 반응에 대한 문제이기도 한다.
문학과 그림은 인간의 인식 능력과 감상의 테두리 안에서 작가의 가슴과 손을 통해 발현되는 표현예술이다. 그렇기에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그것을 어떠한 표현으로 글이나 그림에 담아내느냐는 것은 글쟁이나 그림쟁이 각자의 인식에서 출발하게 된다.
어떠한 개체이건 어떤 현상이건, 무언가를 인식하고 그것을 표현하려 하는 예술가에게 있어 논리의 문제는 수학이나 철학이기도 하지만 사물과 감성에 대한 섬세한 고찰을 요구하는, 보다 복잡한 문제이기도 하다.
빛은 인간의 감상의 기복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주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사고란 게 일반적으로는 정논리를 따르기 마련이라서 빛에 대해서도 반대편에 선 논리를 받아들이기는 어려워 보인다.
‘부논리’라고도 할 수 있는 ‘반논리’는 정논리와는 위상적으로 180도 건너편에 서 있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180도라고 하는 수학의 단위가 이차원적으로 본다면 같은 직선상의 정반대 편에 해당하는 것이니, 사고의 영역에서 본다면 정논리에서는 있었던 것이 부논리에서는 없었던 것이 되고, 정논리에서는 없었던 것이 부논리에서는 있었던 것이 되는 셈이다.
부논리로 빛을 살펴보면 빛이 없는 경우를 '밝다', 그렇지 않은 경우를 '어둡다'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이 표현에 대해 어딘가 이물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색함이란 것은 금방 이해할 수 없는 것이나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요소를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 보자. 아무런 가림 없이 빛이 드는 쪽을 양지이라 하고 무언가에 의해 빛이 가려진 쪽을 음지이라 한다. ‘양陽’이란 한자어를 감상적으로는 좋음이라는 긍정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음陰’이란 것은 좋지 않다는 부정적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빛의 있음과 없음을 기준으로 한 이 이분법적인 표현에서, 인간은 무엇을 기준으로 좋고 나쁨을 나눈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용어만으로 보자면 햇빛에 대한 노출 여부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 보이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문을 품어볼 수 있다.
“정논리에서는 왜 양지를 밝다고 하고 음지를 어둡다고 하는 것일까. 대체 밝음과 어둠의 기준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비단 빛만이 세상의 중심이란 생각을 인간은 언제부터 가지게 된 것이고, 그 기준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사실 절대 값으로 본다면 태양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 낮 시간의 응달이 밤의 달빛 아래의 양달보다 훨씬 환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둡다는 것과 밝다는 것이 절대적인 빛의 양이나, 그 빛이 종속된 시간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밝다'와 '어둡다'라는 단어적인 의미는 결국 현재 내가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에서의 상대적인 현상일 뿐이어서 어떠한 절대성을 부여받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온도를 양논리와 음논리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겨울의 양지에 대한 선호는 여름의 음지에 대한 선호가 된다. 여름 태양의 뜨거움이 주는 부정적 표현은 겨울 태양의 따뜻함이 주는 긍정적 표현이 될 수 있기에 시간에 따른 상대성은 정과 부, 양과 음의 절대성에 의문을 제기하게끔 만든다.
결국 밝음과 어두움, 양지와 음지가 갖는 의미는 사회문화적이고 개인의 감상에 기인한 상대적 상황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