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철없는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이야기

소나기, 철없는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이야기



1.

책장에 꽂혀 있는 이 책과 저 책을, 마음 가고 눈이 가는 대로 기웃기웃 대다가, 문득 손에 걸리는 책 한 권을 골라 이 글 저 글 읽다가 보면, 비록 그것에 가해진 세월의 변색 작용을 비켜 서진 못했다고 해도,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 있던 글 몇 구절이, 일찍 깨어난 새벽녘의 상념처럼, 아련하게 만져지기 마련이다.


미동 하나 없이 가만히 놓여 있던 그 글은, 언제인가 필시 변성 작용을 거쳤을 것이고, 거기에 더해진 적당한 왜곡과 채색은, 분명 그것이긴 했지만 그것이 아닐 수 있는 확장된 그것을, 막상은 선명하지는 않지만, 그것 인양 재생산해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또 다른 작용이 가해진 그것은 점차 자신의 윤곽을 분명하게 세워서, 어느 날인가부터는 그 글을 읽던 때의 자신이 애초 그 글의 주인공이었던 양, 커다란 똬리를 틀어 들어앉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포장해서 얘길 하자면, 그 글에 스며든 애정이란 효모가 원래의 글을 잘 숙성시켜가는 과정과, 그것을 견뎌낸 시간이 조화를 이루어 일구어 낸 산출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원래의 글에 가해진 변이가 행할 수 있는 여러 가지의 부수적인 작용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 글이 가는 길과는 조금 다른 방향이기에 우선은 논외로 한다.


글은 어떤 이야기를 문자의 덩어리와 나열로 옮겨낸 것이기도 하니, 이야기는 글의 원재료인 셈이다. 따라서 이야기 또한 글이 그러한 것처럼 위에서 설명한 현상을 거친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지 간에 어떤 글에 대해 느끼는 애정의 깊이가, 분명 그것이지만 그것이 아닐 수도 있는 또 다른 이야기를 그려내게 되는 단계에까지 오른 즈음에 가서야, 그 글에 대해 늘어놓는 사사로운 의견 몇 마디를 행여 지식에 취한 주정뱅이의 중얼거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못하게 될 것 같다.

황순원 님의 <소나기>는 나에게 그런 부류의 글이고 숙성을 거쳐 향기 좋게 잘 익은 이야기이다.

이 글을 알게 된 처음부터, 마치 겨울 끝 무렵의 새벽녘 산책길에서 만난 짙은 물안개처럼 글 속으로 울컥 빠져들었고 지금도 그 걸음에 밴 축축한 물기를 털어내지 못하고 있다. 깊이를 더해가는 애정은 애착으로 이어졌고 애착이 끌어낸 집착은 <소나기>에 대해 사족을 그려 넣고 싶게 만든다.


애정은 원래 이성의 울타리를 벗어난 설명하기 난해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애정을 느끼게 된 대상은 구속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걸어가기 십상이다. 일단 입 밖으로 뱉어낸 주절거림은 끊어버리지 못할 것 같은 애증의 굴레에 엮여 버리게 만든다.



2.

소나기의 소녀 소년에 대해선 두 가지에 대한 오해를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글을 쓰는 이의 오해이고 나머지 하나는 글을 읽는 이의 오해이다.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상황을 가만히 살펴보면 의도된 어떤 장치를 찾아볼 수 있게 되니, 이런 경우에는 ‘오해’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의미에만 연결시켜 상상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글을 쓰는 이나 읽는 이가 인지할 수 있는 ‘의도된 오해’는 오해가 아니라 그것의 내용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할 수 있게 된다.


아무튼 이것에 대해 첫째는 이러하고 둘째는 저러하다, 따라서 결과적으로는 이러저러하다는 식으로 체계를 갖추어 명시적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때로는 암시만으로도 쓰는 이의 의도를 이해하기에는 충분할 수도 있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나 소나기가 흔히 또는 간혹, 마치 어른들을 위한 동화 인양 얘기되곤 한다. 이 견해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거나 난센스 같은 쓸모없는 이야기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소나기와 어린 왕자 이 두 작품을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고 하기에는 글 여기저기에서 느껴지는 세월의 흔적을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다. 혹시 암시적으로 남겨진 그러한 장치들이 ‘동화 같은 무엇’에게 ‘동화 같은 느낌’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을 위한 글이라고 하면 동화나 동시가 떠오르게 된다. 동화와 동시에 대해 오래전부터 가졌던 의문은, 중년 또는 노년의 글쓴이가, 어찌 어린이의 마음으로 어린이를 위한 글이나 시를 쓸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어린이를 위한 것이라 해도, 작가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회한이나 이루지 못한 바람 같은 것을 어린 시절의 몇몇의 추억과 거기에 더해진 이야기 속에 풀어내는 것뿐일 텐데, 실제로도 글의 상황과 내용을 꼼꼼히 읽어가다가 보면 그런 점들이 연이어 보이는데, 어째서 그러한 글을 어린이를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인지, 의아한 생각이 들곤 하였다.


아이들의 마음은 이러이러할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이나, 아이라면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자신의 바람, 또는 자신의 채색된 추억을 마치 현실이었던 것처럼 짧은 산문이나 운문 속에 담아낸 것을 동화나 동시라고 일컫고 있는 것은 아닐까.



3.

좀 더 현실적으로 보자. 동화나 동시의 대상이자 소비자인 아이들은 결코 혼자서 서점에 가질 않는다. 혼자서 서점에 가질 않으니 직접 책을 구입하거나 글을 찾아서 읽지 않는다. 그런 아이가 혹시 있다면, 물론 있을 수도 있겠지만, 실로 대견한 일일 뿐이다.


결국 아이들을 위한 글을 쓰는 사람도 기성세대이고 선택하여 읽게 만드는, 또는 읽는 사람도 대개의 경우 기성세대이니, 기성세대의 감성으로 기성세대의 감성을 토닥토닥 잘 건드려주면 왠지 그것이 어릴 적 자신의 추억이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을, 아이들을 위한 글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관점으로 보자면 황순원 님의 소설 <소나기>의 주인공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읽느냐 또는 누가 읽느냐에 따라, 실제로의 그 소년과 소녀가 누구이건 상관없이, 지금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중년의 남자와 여자, 세월이 날린 먼지를 온몸 가득 뒤집어쓴 어른 사내아이와 어른 계집아이라고 여긴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이것이 어른 사내아이가 짧게 그려낸 <소나기>에 대한 굵은 줄기이다.

‘다른 사람들처럼’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면 너무 속되게 보일 것 같지만, 나 또한 소나기 속의 터벅 머리 수줍은 어린 사내아이였기를, 언젠가의 그 시절에 그런 일이 나에게도 있었기를 바라며 살아온 것 같다. 그 짧기도 하고 길기도 시간만큼의 애증이 소설 <소나기> 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자기가 있어야 할 때와 곳이 있는 법이다. 때 이르다거나 곳 맞지 않은 발현은 어딘가에서 뒤틀림과 변형으로 인한 틈새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사람의 삶 또한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그것이 언제 어디가 될 것 인지에 대해선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담장 높은 난제가 앞을 가로막아 서게 된다.


‘제 때를 찾아 제 곳에 자리 잡는’ 현명함을 갖추려는 것 또한 어쩌면 잔잔하지만 격한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소나기에 대해 가슴 한 구석에 깔려있는 촉촉한 감상은, 하루 종일 걷히지 않는 숲 속 호수에 낀 물안개처럼 결코 때 이르다거나 때 늦은 것이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다. 현실적 상황이야 어떻든 간에, 상관할 바는 아니다.


사람이란 게 어디 이성만으로 살아가는 존재인가. 감성이 이성을 누르는 순간, 소나기의 개여울은 한 발짝 바로 눈앞에 놓여있는 현실의 것이 된다. 바짓단을 살짝 적시녀 첨벙첨벙 개울물을 튕기면서, 맘껏 깔깔거리며 건너가면 된다. 어쩌면 하늘을 흐르던 구름 한 줄기가 그 시절의 뒷집 계집아이처럼 등짝에 내려 기댈지도 모르겠다.


인간이란 스스로가 스스로를 위안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나나 우리는 소설 속의 소년과 소녀는 아니었지만, 스스로가 그려내는 비슷하지만 또 다른 소설 속의 주인공일 수는 있는 것이다. 더 나이가 든다고 해도 그리고 더 인생을 알게 되더라도, 감성의 줄을 놓지 않고 있다면, 설혹 그것이 가늘고 여린 한 줄기 일뿐이라고 해도, 마을 어귀에 있던 그 개울가를 영원히 떠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철없는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이야기’, 그것이 세월 잔뜩 먹은 철들지 않은 어른이 읽는 또 다른 소설 <소나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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