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란 과연 무엇일까. ‘인간’에 대한 물음은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카프카는 밤마다 글을 쓰며 구도를 길을 걸어갔다. 그는 텍스트를 통해 인간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졌고, 그 물음 속을 부조리하게 헤매다가, 문득이었다고도 할 수 있고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어느 날에, 이 세상을 떠나갔다.
떠나간 것이 아니라면 벗어난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탈주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찌되었건 프란츠 카프카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래서 카프카라는 한 인간은 물리적으로는 ‘무’(無)의 상태로 변이하였다. 물음 하나가 생겨난다.
“그렇다면 카프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존재에 대한 물음은 ‘들뢰즈의 욕망’과도 같아서 방향 없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존재한다는 것이 단지 살아있다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일뿐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한 인간의 삶이 끝나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일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카프카라는 이름으로 떠돌아다니고 있는 수많은 텍스트들은 존재하지 않는 카프카가 만덜어 내고 있는 환영에 불과하단 말인가. 카프카 그는, 생전에 자신을 존재한다고 여겼던 것일까.”
“인간은 죽음으로 인해 ‘무위’의 상태로 빠지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허무한 일이란 말인가.”
“인간의 존재가 단지 물질적인 것에만 있다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스스로의 질문에 빠지게 되는 형이상학적인 인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갖게 되는 존재가 우리라는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은 결코 철학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존재에 대해 철학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단서들을 여기저기에 흩뿌려 놓았다.
그들이 남겨놓은 단서들은 밤하늘에서 반짝이고 있는 총총한 별빛과 같아서 어둠 속에서도 길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도록 해주고 있다.
철학자들은 존재를 기본적으로 고정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존재는 ‘응시하는 존재’와 ‘응시당하는 존재’이다.
또한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존재는 ‘불안에 대한 물음을 갖는 존재 일부’과 ‘그 물음에 응답하는 존재 전체’이다.
샤르트르와 하이데거의 관점을 융합하게 되면 존재는 ‘불안해 대한 물음을 갖는 응시하는 존재 일부’와 ‘그 물음에 응답하는 응시당하는 존재 전체’에 관한 것이 된다.
이에 대해 소수-다수의 문제를 대입하면 ‘물음을 갖고 응시하는 존재 일부’는 소수인 것이고 그 ‘물음에 응답하는 응시당하는 존재 전체’는 다수인 것이다.
이에 반해 들뢰즈의 관점에서 존재는 ‘욕망하는 기계’인 개체의 ‘멈추지 않는 욕망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 바라본 욕망은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개념만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이라서 현실을 생산해낸다.
관습적 욕망과 무의식적 욕망이 뒤엉켜 있는 것이 욕망이기에, 욕망에서는 일정한 규칙을 찾아볼 수 없고 비방향성과 불규칙성만이 다발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들뢰즈는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욕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욕망이란 무의식의 자기생산을 말한다. 욕망은 어떤 것도 결여하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욕망은 자신의 대상을 결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존재에 대한 문제는, 물음을 갖고 응시하는 욕망하는 기계 소수와 물음에 응답하는 응시당하는 욕망하는 기계 다수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by Dr. Franz Ko(고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