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 년하고도 열 한 달이라는 길지 않은 카프카(1883년 7. 3 - 1924. 6. 3)의 인생에서 1912년은 다른 어느 해보다 중요한 해였다.
1912년의 봄 무렵부터 카프카는 자신의 첫 번째 작품집인 <관찰>(Betrachtung)에 실릴 원고들을 수정 및 탈고하면서 자신의 문학세계를 되짚어볼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관찰>은 1904년부터 써놓았던 짧은 글들을 모아서 1911년 12월경부터 집필한 카프카의 첫 번째 작품집이다.
<관찰>은 로볼트 베르렉(Rowohlt Verlag)출판사에서 1912년 말에 인쇄되었으나 실제 출간본에서는 1913년에 출간한 것으로 인쇄되어 있다.
후일에 영문으로 번역되면서는 ‘명상’, ‘사색’이란 의미를 가진 <Meditation>, <Contemplation>이란 두 가지 제목으로 소개 되었다.
이것을 직역하게 되면 <카프카의 명상집>, <카프카의 사색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어에서는 독일어판을 그대로 번역한 <관찰>이란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다.
<관찰>은 카프카가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첫 작품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 독자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판매 또한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판매부수만을 놓고 보면 카프카의 <관찰>은 독자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을 당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1912년 말에 인쇄된 초판 800부 중에서 일부는 1924년에 카프카가 사망할 때까지도 판매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남아있는 부수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이미 얘기한 것처럼 생전에 카프카는 결코 인기 있는 작가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는 살아서는 무영의 작가였지만 죽어서는 현대문학을 개척한 유명 작가가 되었다.
어쩌면 그의 작품들이 시대를 너무 앞서 갔거나, 시대가 미처 그의 문학세계를 따라가지 못했다고도 볼 수 있다.
카프카는 자신의 문학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시대를 고독하게 살아갔던 것이다.
아무튼 카프카의 문학에 있어 1912년이 중요한 것은 이 해의 봄 무렵부터 <관찰>의 집필에 본격적으로 매달림으로서 ‘카프카다운’ 자신의 문체를 좀 더 확고하게 확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8월 말에는 펠리체 바우어를 만나 9월부터 연애를 시작하면서 카프카의 창작 에너지는 여느 때보다 더욱 고조되어 있었다.
<관찰>은 이십대 말을 지나 이제 갓 서른으로 넘어가고 있던 프라하의 한 문학청년을 ‘자신의 글을 쓰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지낼 수 없는 열정에 찬 문학 작가’로 변신시켰다.
1911년 말부터 1912년 말까지 카프카는 일기와 문학 노트에 그때까지 써 두었던 여러 글들을 고르고 다듬어서 각각을 단편으로 완성한 다음, 전체를 한 권으로 묶어 <관찰>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관찰>은 카프카가 1904년부터 1912년까지, 나이로는 이십대 초반부터 이십대 말까지, 쓴 단편들을 모아 놓은 작품집으로 공식적으로는 1913년에 출간되었지만 실제로는 1912년 말에 인쇄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관찰>에 수록된 작품들에서는 이십대의 풋풋하고 날카로운 카프카를 만날 수 있게 된다.
<관찰>은 카프카가 자신의 이름을 붙여 출간한 첫 작품집이었기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 집필하였다.
카프카는 출판사나 독자들의 관점에서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까지도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물론 그것은 카프카의 성격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카프카가 자신의 첫 작품집인 <관찰>에 남다른 애정과 기대를 가졌었다는 것은 <관찰>에 실릴 단편들의 순서에 대해서 책이 출간되기 바로 직전까지 고민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카프카는 책의 첫 작품으로는 <국도의 아이들>(Children on a Country Road, 시골길 위의 아이들)이 되어야 한다는 편지를 출간 직전에 급히 로볼트 베르렉 출판사의 편집자에게 보냈다.
이름 없는 한 작은 아이(unnamed little child)를 화자(narrator) 삼아 이야기가 전개되는 <국도의 아이들>은 결국 카프카의 작품집 <관찰>의 첫 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국도의 아이들>로 번역되어 있는 이 단편 작품은 독일어 원문에서는 <Kinder auf der Landstraße>이다.
여기에서 ‘auf’는 [전치사]로 ‘~(위)에(서)’이고, ‘Landstraße’는 [여성형 명사]로 ‘촌락 간을 연결하는 지방 도로, 국도, 시골길’이란 뜻을 갖고 있다.
또한 영문 판에서는 <Children on a Country Road>으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따라서 독일어 원문과 영문판을 종합해서 보면 <국도의 아이들>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시골길 위의 아이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러울 수 있다.
기술한 바와 같이 카프카는 <국도의 아이들>이 <관찰>의 첫 번째 작품으로 실리기를 바랐다.
그 이유는 아마도 저녁 무렵이면 부모님의 집 정원에서 슬며시 빠져나와서 잠을 자지 않는 남쪽 나라로 달려가 버리는 아이의 이야기가, 인디언처럼 고함을 지르면서 뛰어오를 때 엉덩이 밑에서 이는 바람을 느끼는 아이의 이야기가, 밤이면 어두운 책상머리에서 글쓰기의 세계로 달아나 버리는 카프카 자신의 이야기와 닮아 있기 때문일 수 있다.
결국 이야기의 서술자인 ‘한 이름 없는 아이’는 카프카 자신이기도 한 것이다.
카프카는 자신의 첫 번째 작품집의 첫 번째 이야기를, 바로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국도의 아이들>에 나오는 몇 문장만으로도 그런 카프카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고개를 쳐들고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저녁을 헤쳐 나갔다. 몇몇은 길의 가장자리에 있는 도랑으로 뛰어 들었다가 어두운 둑 앞으로 사라졌다. 그러다가는 어느새 들길로 올라서서 낯선 사람들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생각 좀 해봐,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잠을 자지 않는대.”
“그건 왜?”
“그 사람들은 피곤해지지 않으니까.”
“그건 또 왜 그렇지?”
“그 사람들은 바보이니까.”
“바보들은 피곤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봐, 바보들이 어떻게 피곤해 질 수 있겠니.”
뜬금없이 고개를 돌리면서 생의 낯선 풍경을 찾아서 길을 떠나는 이름 없는 이 작은 아이는, K와 그레고르 잠자와 카를 로스만과 같은, 카프카의 텍스트가 탄생시킬 인물들의 출현을 암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국도의 아이들>를 통해 카프카의 내면에서 유년의 세계를 끄집어 낼 수 있게 한다.
카프카의 유년 세계 중심에는 어둠이라는 무채색의 실을 엮어 짠 천으로 만든 무채색의 옷을 입고, 무채색의 길 위를 걸어가고 있는 한 아이가 있다.
무채색의 세상에서 아이는 이름을 잃어 버렸다.
어쩌면 잊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카프카가 탄생시킨 인물들은 그 아이의 현실에서의 환영이며, 그 인물들은 항상 어떤 것의 통제 안에 있다는 점에서, 그 아이가 현실 세상으로 확장되어 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by Dr. Franz KO(고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