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새롭게 선출된 프라하 시장의 취임식에서 프라하의 정체성을 변화시키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새 시장은 취임사에서 ‘100개의 첨탑이 있는 도시 프라하는 전성기를 맞은 소중한 슬라브인의 도시’라고 연설하였다.
그의 취임사에 포함되어 있는 이 문장에는, 체코는 슬라브인의 나라이며 그 수도인 프라하는 당연히 슬라브인의 도시인데도, 그때까지는 그렇지 못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새 시장의 이 취임사는 당시까지 많은 분야에서 사회적인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던 독일계에 대한 정치적인 선전포고와 다름없었다.
이에 독일계 시의원들이 항의하며 시의회를 탈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날의 사건으로 인해 체코계를 포함한 비독일계의 프라하 시민들은, 비록 아직까지는 독일계들이 프라하의 경제계와 교육계, 문화계에 있어 주류 계층을 형성하고는 있지만 수적인 면에서나 정치적인 면에서 더 이상은 그들을 주류라고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이런 정치적 지형의 변화는 프라하를 사회적인 격랑 속으로 휘몰아 넣었다.
프라하의 독일계 사람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1300년대에 독일의 영토에서 프라하로 이주를 시작한 후에 약 오백여 년 동안을 정치와 경제, 교육과 문화에 있어 프라하의 주류 계층을 형성해서 살아왔기에, 특히 지난 이백 여 연간은 그들의 정체성이 곧 프라하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전성기를 누려 왔기에, 이런 정치적인 지형 변화와 그에 따른 사회적인 위상의 변화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러한 변화를 누군가는 외면하려 했고 누군가는 일찍부터 받아들였다. 비독일계 사람들 중에서도 독일어를 기반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유대계와 같은 사람들 또한 이러한 변화의 영향을 점차적으로 받게 되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사회적인 체제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변화하지는 않겠지만, 프라하는 모든 면에서 분명 변화하고 있었다.
사회적 변화는 사회적 혼돈을 불러오는 법이다.
특히 프라하에서 살아가고는 있지만 체코계도 아니고 독일계도 아닌 사람들에게 있어 그러한 혼돈은 또 다른 형태의 정체성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게 된다.
사회적으로 그러한 배경 속에서, 새로운 시장의 취임이 있었던 다음 해인 1883년 7월 3일에 카프카가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카프카가 성장하고 교육을 받은 환경 또한 그 자체가 일종의 혼돈이었다.
수적으로 다수인 체코계가, 그때까지 사회적으로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던 독일계를 점차 대신하고 있었다.
많은 독일계 사람들이 그들의 땅인 독일로 떠나가고 있었지만 프라하의 경제계와 교육계는 아직 독일계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카프카의 정체성은 부유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아들인 프란츠 카프카를 독일어를 기반으로 하는 학교에서 교육시켰다.
대학교조차 최고의 명문 독일계 대학에 진학하여 법학을 공부하도록 했다.
그는 하나뿐인 아들이 프라하의 독일계 사회에 진입해서 주류 독일인들처럼 살아가길 원했다.
그것이 아들인 프란츠 카프카가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헤르만 카프카는 당시 프라하의 거리마다 만연하고 있었던 시대적인 변화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그런 변화를 알아차라기는 했지만 그것을 단지 일시적인 현상 정도로만 받아들였거나, 프라하에서 체코계 사람들이 사회적 주류가 되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거나, 독일계 사람들이 사회적 소수가 되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체코계가 주류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독일계가 주류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유대인들에겐 최선책일 수는 없어도, 적어도 차선책은 될 수 있다고 여겼을 수 있다.
체코계도 독일계도 아닌 유대인 카프카는,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정체성의 혼돈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작가로서의 카프카의 혼돈은 이러한 시대적인 혼돈과 다양한 사회적 규정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역적으로 보면 카프카는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를 기반으로 작품 활동을 한 [체코의 문학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정치적으로 보면 당시 체코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므로 카프카는 [오스트리아의 문학 작가]였다고도 할 수 있다.
언어적인 면에서는 카프카가 독일어 기반의 교육을 받았으며 독일어로 작품 활동을 하였기에 [독일어 문학 작가]이기도 하다. 또한 카프카는 혈통적인 면에서는 [유대인 문학 작가]*이다.
*당시는 이스라엘이란 유대인의 나라가 아직 지구상에 존재하기 전이었기에, 국가 명을 붙여 ‘이스라엘의 문학 작가 카프카’라고 하기 보다는 민족을 붙여 ‘유대인 문학 작가 카프카’라고 하는 것이 좀 더 타당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카프카의 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이런 식의 주장들은 하나하나 모두가 반론을 불러일으키고는 있지만 어느 것 하나도 완전하게 틀렸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문학작품 번역자이자 옥스퍼드 대학에서 독일어와 독일문학 전공(German language and Literature in Oxford) 교수로 재직 중인 카렌 리더(Karen Leeder, 1962 - )는 카프카에 대한 이러 식의 여러 사회적 규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카프카에 대한 이런 식의 규정은 그가 사용한 언어가 독특하다는 것에서 제기되는 것이기도 하다.”
유대인 카프카는 체코의 영토인 프라하에 태어나고 살았지만 독일어 기반의 교육을 받았고 독일어로 글을 썼다.
그래서 카프카에게 있어 독일어는 모국어와 다름 없었다.
카프카가 독일어 기반의 교육을 받은 것은 가장인 아버지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독일어로 글을 쓴 것은 카프카 자신의 의지를 따른 것이었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카프카가 당시 사회적으로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던 독일인들과 같이 생활하며 그들처럼 성공하기를 바랐다.
어쨌든 카프카가 문학적으로 관심을 두었던 것은 체코어 문학이나 유대인 문학이 아니라 독일어 문학이었다.
이와 같이 언어적으로 카프카를 규정하는 것은 독일어였다.
카프카가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독일어였고 글을 쓰는 언어도 독일어였다.
하지만 지역적으로 카프카를 규정하는 것은 프라하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프라하 자체라기보다는 당시 프라하라는 도시가 처해있었던 사회적, 시대적 환경이었다.
프라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는 독일어권 국가인 체코의 수도라는 아주 특별한 환경 속에 놓여 있었다.
이곳에서 카프카는 민족주의 정서가 유럽 전역에 몰아치고 있던 1883년에 태어났다.
공식적으로는 프라하가 체코어를 사용하는 도시였기에 카프카는 체코어로 쓰여진 공공 표지판과 안내문들을 보면서 성장하였다.
하지만 그 시기는 아직까지 독일계 사람들이 프라하의 경제계와 교육계, 문화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 시기가 더욱 특별한 것은 많은 독일계 사람들이 프라하를 떠나 독일의 영토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환경의 변화를 감지하고 자신들의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는 국가인 독일 땅으로 ‘귀향’ 또는 ‘철수’를 결정한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사회적 추방’에 따른 민족적 이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것에 대해 어떤 식으로 부르든지 간에 그들은 자신들의 선조가 이룩해 놓은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그들의 뿌리를 찾아 독일 땅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프라하는 독일계 사람들이 제아무리 몇 백 년 동안 주류를 형성해서 살아왔지만 결코 독일의 도시가 아니라 체코의 도시라는 것을, 단 한 번도 독일의 도시였던 적이 없다는 것을, 이로써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된다.
당시 프라하가 겪었던 이러한 상황에 대해 ‘독일계 사람들이 종말론적으로 감소하던 도시’였다고, 옥스퍼드 대학의 카렌 리더 교수와 같은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표현은 세계사에서, 특히 서양을 중심에 둔 역사에서 영국이나 독일, 프랑스와 같이, 타 민족을 지배했던 국가들의 시야를 통해 당시 프라하에 있었던 시대적 사회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기울어진 지배 계층의 논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어떤 학자들의 논리가 어떤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건 간에, 어떤 논리가 어떤 식으로 기울어진 시야에서 비롯된 것이건 간에, 당시의 이러한 사회적, 시대적 환경은 프라하라는 도시에서 성장기를 맞이했던 카프카의 정체성 형성과 문학 세계에 분명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