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뫼비우스의 끈, 완행열차에 대한 단상

뫼비우스의 끈, 완행열차에 대한 단상


접착력 좋은 끈끈이처럼 몸 어딘가에 쫙 달라붙어버린 삶의 무게와, 뭔가 해야 할 것 같은데도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먹먹한 두려움이 억 겹의 세월을 헤쳐온 듯 발걸음을 짓누르는 날이면, 어쩔 수 없이, 기다란 쇳덩이를 이어 길게 늘어놓은 철길을 덜커덕덜커덕 둥글게 굴러가는 네모난 객차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얇은 진청색 등 가방에서 끄집어낸 책 한 권을 아무렇게나 펼쳐든다.


마을 끝자락에 있는 폐가 마루에 남겨져 있는 누군가의 땟자국 같기도 하고 마을길에 지천으로 깔리는 겨울 아침의 찬 서리 같기도 한 지난 이의 흔적이 덕지덕지 차창에 눌어붙는다.

머리를 살짝 기댄 채로 창밖으로 밀려가는 풍경에 한참을 눈 맞추다가 불현듯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마음이 일어 누런 종이 위에 박아 놓은 활자의 궤적을 쫓아 길을 나선다.


쇠바퀴 구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때 맞춰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칼칼한 목소리가 늙은 할미가 부르던 기억 없는 자장가 가락 같아 어느새 반쯤 눈이 감긴다.

밀폐된 공간을 가만히 유영하다 보면 행여 말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해도 괜찮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검은 활자의 유혹에 마음을 맡기고 진한 체취를 들이켜면 되니.

속도의 관성에 살짝이나마 몸이 기울어질 때면, 잘 붙여두었던 추억 조각이 행여 창 밖 풍경을 따라나서게 될까 봐 마음마저 조마조마 해진다.

미세한 간극이나마 허용치 않으려면 등이며 허벅지에 신호를 보내어야 한다. 조금만 더 견뎌내라고, 지금까지 잘해왔다고.


패브릭 좌석 등받이에 밀착된 등짝이 지난 이인지, 그전 언젠가의 지난 이인지의 눅진한 흔적을 더듬다가 익숙한 무엇을 찾아낸다.

주변을 맴돌기만 하던 기억 몇 줄기가 덩치 크지만 겁 많은 변두리 깡촌 사내놈이 제 색시 치맛자락 붙잡고 매달리듯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

닫혀있던 밀실의 문을 열고 빠끔 들여다본다. 그이기는 하지만 딱히 '그'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뭣한 그가 마음의 그곳에 그대로 서 있다.


그 시간은 이미 지나가 버렸고 지금의 시간도 흘러가고 있다.

검지를 세워 톡톡 시곗바늘을 두들겨보지만 어디부터가 현재이고 어디까지가 지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 시절 나의 족적을 기억하고 있을 몇몇 책들은 아직 책장 한편에 남겨져있지만 더 많은 녀석들은 추억의 흑백 필름에 박혀 버린 색 바랜 영화의 몇몇 장면이 되어, 흐리지만 지난 시간의 풍경 속에 꽂힌 채로 언젠가 다른 때의 상영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누구이고 그 공간은 어디였을까.

시간은 이제 그 공간의 그가 정말 나였는지, 누구였는지, 더듬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흐리게 만들었다.

과연 나는 그곳에 그때 정말 존재하기나 했던 것일까.


나의 인지가 기억할 수 있는 열차라는 이름을 붙인 명사에는 특급열차와 완행열차, 두 가지만이 있을 뿐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작품 <가진 자와 안 가진 자> 식의 이분법적 구분은 단순화라는 함정에 빠지기 십상이긴 하지만 단순함이란 게 손쉬운 접근성에 넓은 포용성마저 지니고 있어 그때의 나를 방어하기에는 무엇보다 더 좋은 논리임을 애써 부인할 필요 따위는 없다.


게다가 헤밍웨이라는 대작가를 앞세워 나름 '있어 보이도록' 그럴듯하게 포장을 입혔으니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를 세상의 근본 진리라고까지 끌어 높인다고 해도, 그래서 세상을 단순화시킨다고 해고, 어색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다.


가질 수 없어 못 가진 것과 가질 수 있지만 안 가졌다는 것을 굳이 떼어내려는 노력 따위도 할 필요가 없다.

곤궁을 온몸에 걸쳤던 그때의 나에겐 '이분법은 곧 헤밍웨이'라는 궤변을 증명이 필요 없는 삶의 논리로 지어낸 것이 딱히 수지맞는 일만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리 나쁘지만도 않은 적당한 타협이었다.


어쨌거나 특급열차와 완행열차는 기차역 플랫폼에 선 그때의 나의,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려지는 또 다른 삶의 표식이었다.


어느 날엔가 특급열차와 완행열차 그 둘은 새마을호와 통일호, 비둘기호란 이름으로 호적을 갈아탔다.

하지만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고 다시 나비가 되는 것 같은 특별한 변태가 거기에선 발견되지 않으니 그 따위의 명칭 변경은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고 완행열차와 특급열차란 이름만이 영원의 기억 속에 남겨져 있을 뿐이다.


대게 이런 식의 완고함에는 무언가 그럴만한 이유를 찾아볼 수 있기 마련이다.

그 시절의 나에게 특급열차란, 절대 기웃거려서는 안 될 금기의 영역이었고 그 객실 안이 어땠는지는 설핏하게나마 본 적도 없으니 궁핍한 나의 상상력은 비행기의 비즈니스 칸이나 오리엔탈 특급에서 본 몇 장면에 특급열차의 객실 이미지를 중첩시키게 된다.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상상의 조각을 고집스레 짜 맞추려는 것이 그 이유라면 이유일 게다.


아직 체온 남아 있는 커피를 입 안에 머금고 눈을 감는다.

책 한 권 집어든 그때의 내가 완행열차에 오른다.

느리게 달리는 열차는 시간도 공간도 알 수 없는 길고 긴 철선 위에 늘어진다.

좁고 가는 선이 무한 재귀적으로 확장된다.

꼬여진 공간을 돌고 돌아온 열차는 이곳이지만 이곳이지도 않은 것 같은 이곳을 다시 지나간다.

같아 보이지만 다른 면, 꼬여진 무한의 공간을 가로지르는 기찻길은 머나먼 길을 걸어온 내 삶의 뫼비우스 끈인가 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내리지 않는 완행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