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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의 개념을 통해 접근한 들뢰즈의 '장'에 대한 고찰

차원의 개념을 통해 접근한 들뢰즈의 '장'에 대한 고찰


사실 들뢰즈가 말하고 있는 ‘배치’라는 것의 내용은 ‘철학적’이라거나 ‘수학적’이라는, 조금은 거창해 보일 수도 있는 표현을 굳이 사용하지 않더라도 ‘차원’(Dimension, 次元)이라는, 물리적이면서 또한 다소는 형이상학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개념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표준 국어대사전을 보면 차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차원:

1. 사물을 보거나 생각하는 처지. 또는 어떤 생각이나 의견 따위를 이루는 사상이나 학식의 수준.

2. (물리) 물리량의 성질을 나타내는 것. 또는 물리량의 기본 단위와 유도 단위의 관계.

3. (수학) 기하학적 도형, 물체, 공간 따위의 한 점의 위치를 말하는 데에 필요한 실수의 최소 개수. 직선은 1차원, 평면은 2차원, 입체는 3차원이지만 n차원이나 무한 차원의 공간도 생각할 수 있다.  

   

차원이라는 개념을 들뢰즈가 말하고 있는 ‘기계’와 ‘배치’의 문제에 대입하게 되면 세상의 구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점이다. 점은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시작이면서 끝이라 할 수 있다. 점은 그 자체가 0인 상태는 아니지만 0의 상태에 무한하게 가까운 ‘공간에서의 도형’이자 물체이다.

개체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다. 어떤 개체를 계속해서 미분하게 되면 그것은 점차 ‘0’인 상태에 수렴하게 되며, 0이 되기 바로 직전의 궁극적인 상태는 하나의 점이 된다.

점은 자연계의 한 개체가 가질 수 있는 마지막 물질적인 형상이지만 0에 극한으로 가까워지게 되면, 비록 수학적으로나 물리학적으로는 존재하는 상태이긴 하지만, 인간의 인지능력으로는 존재한다고 인식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결국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개체는 극한의 ‘0 되기’(becomes 0)를 향해 수렴해 가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의 인식 능력은, 점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 개체를 ‘무위’(無爲)의 상태에 빠졌다고 여기게 된다. 무위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자 현상을 초월해 상주 불변하는 상태’이기도 하다. 그래서 점은 무위라는 철학적인 문제와 인식의 영역에서의 물리학과 수학을 연결시키는 고리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따라서 들뢰즈의 철학의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는 기계는, 점의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점은 차원의 씨앗이긴 하지만 점만으로는 차원을 형성하지 못한다.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기계들이 서로간의 접속을 통해 선을 형성’한다면 ‘기계가 곧 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기계는 개체이기에 ‘개체가 기계이며 또한 점’인 것이다.

점은 개체에 대한 무한한 미분을 통해 찾아낼 수 있는 ‘개체의 정수(精髓, 사물의 중심이 되는 골자 또는 요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 개체가 ‘자신의 실존’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그 정수를 발견할 때까지 끊임없이 미분(微分, 작게 나누는 일)하여야 하며, 즉 자기에서 덮혀 있는 것들을 작게 나누어서 하나씩 벗겨내어냐 하며, 그 인지적 행위를 극한에 이르기까지 반복하다가 보면 자신의 실존 앞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점과 점이 끊어지지 않고 연속적으로 만나게 되면 ‘선’이라고 하는 가장 낮은 단계이자 첫 단계의 세상이라 할 수 있는 1차원의 세상이 이루어진다. 이 선과 선이 겹쳐 만나는 곳에서 ‘면’이라는 2차원의 세상이 형성된다. 면을 이룬 세상은 비로소 인간의 인식 능력 가까이로 한걸음 더 다가설 수 있게 된다.


다시 이 면은 하나 이상의 다른 면과 연속적으로 겹쳐 만나 ‘공간’이라는 3차원의 세상을 형성한다.

3차원에 이르러서야 차원에 대한 인간의 인식능력은 현실이 된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 세상이 3차원이며, 인간이 물리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모든 개체들 또한 오직 이 3차원의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1차원의 세상과 2차원의 세상은 오직 거시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어서 인간의 미시적인 능력은 그것들을 결코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것이 실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1차원과 2차원은 논리적으로는 존재하는 것이긴 하지만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3차원에 존재하지 않는 개체에 대해서도 인간은, 그 개체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인정하지도 못하는 ‘논리적-현실적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때 딜레마에 빠진 인간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탈출구(last exit)는 ‘좀 더 철학적이 되는 것’내지는 ‘신전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는 것’이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이 마주치는 논리적-현실적 한계의 벽을 향해 내리칠 수 있는 도끼인 것이다.      


여기까지 이해한 독자라면 분명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들뢰즈는 ‘기계들이 서로간의 접속을 통해 선을 만들고 나아가 선과 선이 만나면서 면을 형성하며 이 때 면을 형성한 이 장(場)을 배치’라고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들뢰즈의 배치는 면이라는 2차원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2차원에는 그 어느 것도 배치하지 못한다. 배치의 개념은 앞에서 설명한 3차원에 닿아있다. 들뢰즈 또한 3차원의 세상을 살았었고 3차원의 세상 속에서 사고하였으니 그의 개념이 3차원적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물질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어떤 것들도, 그것이 논리적이면서 또한 이성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것들이라면 3차원적이지 않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어떤 것이 3차원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지극히 정상적’이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들뢰즈가 말한 것과 같이 ‘면을 이룬 장을 배치’라고 보기보다는 한 차원 더 앞으로 나아가서 ‘공간을 이룬 장을 배치’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 들뢰즈가 말한 ‘면’은 ‘공간을 포함한 장(場)의 개념’이라고 말하며 그것에 관해 나름의 논리들과 문장들을 늘어놓으려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말이다. 철학이란 학문이, 단어에 유의미한 표현 붙여 넣기, 단어와 단어 사이의 좁디좁은 간격에 자신의 호흡 심어 넣기, 모호한 문장과 표현을 통해 무엇인가가 느껴질 듯하게 만들기, 새롭지 않을 수도 있는 것에 대해 새로운 것이라는 말로 현혹하기, 기존의 것에 다른 것을 끌어다 붙여서 또다른 것 만들어 내기, 이러한 방식들과 그것들의 혼용을 통해 ‘내 식으로 해석’하기가 난무하는, 그래서 복잡하고 난해하며 기괴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 괴논리와 괴변을 양분 삼아 잡초처럼 자라날 수 있는 환경이 너무나도 잘 조성되어 있는,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꽃이 지천으로 피어나서 매혹적인 향기를 뿜어내기도 하는, 그래서 결코 인간의 정신세계를 떠날 일 따위는 전혀 없는,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만의 학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다면 들뢰즈가 설명한 선과 면, 장의 개념이 오류를 가졌다고는 할 수 없다. 만약 그 부분을 계속해서 물고 늘어지게 된다면 철학을 수학이나 물리학과 동일시하려는 학문적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철학으로 존재하고 있을 때에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과 수학 그리고 물리학이 아무런 공통 영역을 형성하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철학적 문학 작가 카프카의 문학’과 ‘문학적 철학자 들뢰즈’의 철학처럼 그것들은 부딪힘과 접속, 융합을 통해 지금도 공통의 영역을 만들어 내고 있다.


뉴욕에서 Dr. Franz 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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