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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


들뢰즈는, 그것이 현상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장에서 배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기계를 ‘욕망하는 기계’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게 되면 인지적으로 실재하고 있는 모든 개체는 ‘욕망하는 개체’라는 말이 된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욕망이란 ‘부족함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이라는 사전적 의미의 단어가 아니라 ‘차이를 생성하려는 의욕’을 뜻하고 있다. 들뢰즈는 배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개체는 다른 개체와 어떤 형태의 차이를 생성하고 싶은 의욕, 즉 욕망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란 차이를 생성하려는 의욕을 가진 개체인 것이다. 


결국 모든 개체의 존재양식은 ‘차이의 생성이 만들어 낸 결과물’, 즉 ‘욕망이 빚어낸 결과물’인 셈이다. 이때 비슷한 결과물을 생성한 개체들은 ‘차이 생성의 바다’ 위에 떠 있는 동일한 하나의 섬에 배치된 것들이며 그 섬에서의 개체들의 배치는 구성과 해체를 반복하게 된다.      


인간의 욕망은 끊임없이 무한히 진동하고 있다. 그 진동에서는 잠시 잠깐의 쉼이나 작은 간극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욕망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원재료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욕망이 진동한다는 것은 ‘인간은 무한히 진동하는 존재’라는 의미인 것이다. 

인간은 다른 개체와의 차이를 생성하려는 의욕을 따름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며 또한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그것이 ‘차이를 생성하려는 의욕’인 이상에는 결코 좌절시켜야 하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사회적 다수가 욕망을 추구하는 것처럼 사회적 소수 또한 그들의 욕망을 추구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가 욕망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그것들에는 단지 그것을 향하는 방법론의 차이와 행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인간 개개인이 가진 이 욕망이 우리 사회의 흐름을 만들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는 있지만 그 흐름이 언제 어디로 흘러갈지를 알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욕망에는 비방향성과 불규칙성이라는 특성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욕망들 중에서는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욕망들은 각기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 차이를 생성하고자 하는 의욕이 만들어낸 욕망은 역동적인 흐름을 만들어 내고, 그 역동성으로 인해 충돌을 일으키며 파괴되고 생성되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 결과로 어떤 것들은 사회의 시스템을 따르게 되고 어떤 것들은 거스르게 된다. 인간의 사회 시스템에서는, 순행하는 것을 사회의 순리를 따르는 것이라고 하고 역행하는 것을 사회에 반항하는 것 또는 저항하는 것이라고 한다. 


욕망을 따라 흘러가는 개체는 다른 개체들과 부딪히며 자신의 현재 위치를 벗어나게 되지만 그때까지 흘러온 흐름을 완전하게 바꾸거나, 그것에서 벗어나기는 극히 어려운 일이다. 자본주의와 같은 사회 시스템은 인력과 척력이 작용하며 흘러가는 거대한 시간과 공간의 장이다. 

하지만 개체가 가진 의지의 정도와 욕망의 강도에 따라서는 시스템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일도 가능할 수 있다. 강한 욕망과 그것을 실현시킬 강렬한 의지만이 사회시스템이 뿜어내고 있는 당기는 힘과 미는 힘을 이겨내고 새로운 흐름을 찾아 진입할 수 있게 된다. 들뢰즈는 이것을 탈주(도주)라 한다. 


배치를 이루는 개체들은 욕망하는 기계들이며 이때 배치는 그것들의 욕망으로 인해 끊임없이 변화하게 된다. 개체가 배치를 형성하는 것을 ‘영토화’라고 할 수 있으며, 형성된 배치가 해체되는 것을 ‘탈영토화’, 개체가 그 배치에서 벗어나는 것을 ‘탈주’라고 할 수 있다. 


욕망하는 개체에게 있어 기존의 배치를 바꾸려는 의욕은 제어할 수 없는 본능이다. 3차원의 공간에 배치된 인간이, 현재의 자신을 규정하고 있는 틀을 넘어 더 나은 다른 삶, 더 나은 다른 존재방식을 추구하는 것은 막아설 수 없는 흐름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의 배치로부터 탈주를 해야만 한다. 이와 같이 다른 삶으로, 다른 배치로, 지금의 배치를 벗어나 바깥으로 이행하는 것을 들뢰즈는 ‘되기’(becoming)라고 부른다.


들뢰즈가 남긴 다음의 문장을 통해, 다수-소수 문제에 대한 그의 사상을 다시 한 번 짚어볼 수 있게 된다.  

“좌파는 소수되기의 집합이라네. 그러니까 다수에는 아무것도 없고, 소수에게 모든 것이 있는 것이지. 그게 좌파의 핵심이라네.”     


들뢰즈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그의 사상은 ‘들뢰즈-마르크스주의’라는 수정된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자본주의로부터 탈주를 이룬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로부터도 탈주를 이루었다. 또한 그는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로부터 탈영토화하였고 결국에는 들뢰즈-마르크스주의에 재영토화하였다.


들뢰즈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기반으로 운영된 사회를 살아갔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의 흐름에 전적으로 따르지 만은 않고 소수되기를 사상과 행위로 실천한 철학자이다. 들뢰즈 또한 자신의 배치에서 탈주하려는 ‘욕망하는 기계’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를 ‘차이를 형성해낸 기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들뢰즈의 철학에 열광하고 있는 사람들은 차이를 생성하려는 의욕을 가진, 욕망하는 기계들이며, 자신의 영토로부터 탈주하여 소수되기의 영토로 재영토화 되기를 열망하는 개체들이란 말인가.”   


뉴욕에서, Dr. Franz 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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