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문학에 대한 또 다른 접근: 들뢰즈
존재란 과연 무엇일까. ‘인간’에 대한 물음은 언제나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존재에 대한 궁금증은 생각하는 자가 걸어야 할 길에 피어난 키 작은 야생화이다.
카프카는 밤의 어둠 속에서 글을 쓰며 구도를 길을 걸어갔다. 그는 텍스트를 통해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끊임없이 던졌고, 그 물음 속을 부조리하게 헤매다가, 문득이었다고도 할 수 있고 예정되어 있었다고도 할 수 있는 어느 날에 부조리하게도, 하긴 물음 자체가 부조리한 것일 수 있었으니 그것이 운명이었던 양, 이 세상을 떠나갔다. 떠나간 것이 아니라면 벗어난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탈주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장 부조리한 죽음은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이라고 여겼던 알베르 카뮈가 교통사고로 한 순간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카뮈에게 있어 자신의 죽음만큼 부조리한 것은 없다. 프란츠 카프카는 아직 젊음의 열기가 서쪽 하늘 끝으로 내려서지 않았을 때, 가을의 늘어진 빛이 자신의 그림자를 키우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글을 썼지만 작가로서는 무명에 가까웠기에 당대를 살아간 한 사람의 남자로 눈을 감았다. 그는 죽으면서도 몰랐을 것이다. 그의 이름 앞에 “The Great Novelist"이란 칭호가 붙게 될 줄은. 그의 죽음 또한 자신의 입장에서는 가장 부조리한 죽음인 것이다. 카뮈와 카프카 두 사람은, 그들 글 속의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장 부조리한 상황에서 이 세상으로부터 탈주하였다.
어찌된 상황으로 인한 것이었건 프란츠 카프카는 이제 더 이상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카프카라는 한 인간은 물리적으로 ‘무’(無)의 상태로 변이하였다. ‘무’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기에 세상은 그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한 사실을 분명 인지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카프카에게 대한 것이라면, 물음 하나를 던지게 된다. “그렇다면 카프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존재에 대한 물음은 ‘들뢰즈의 욕망’과도 같아서 방향 없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존재한다는 것이 단지 살아있다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한 인간의 삶이 끝나게 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일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카프카라는 이름으로 떠돌아다니고 있는 수많은 텍스트들은 존재하지 않는 카프카가 만들어 내고 있는 환영에 불과하단 말인가. 카프카 그는, 생전에 자신을 존재한다고 여겼던 것일까.”
“인간은 죽음으로 인해 ‘무위’의 상태로 빠지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허무한 일이란 말인가.”
“인간의 존재가 단지 물질적인 것에만 있다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스스로의 질문에 빠지게 되는 형이상학적인 인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존재에 대한 물음의 선(線)과 선이 부딪히다가 결국에는 욕망에 접속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차이를 생성하려는 의욕이 좌절되지 않을 때에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어떤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 후라고 해도 그 사람이 남긴 어떤 것이 계속해서 차이를 생성하면서 다른 것들과 부딪히고 접속을 이룬다면, 그래서 새로운 무엇인가에 재영토화를 한다면, 그 사람은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게 된다.
살아가면서 언젠가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갖게 되는 생각하는 존재가 우리라는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은 결코 철학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가 무엇인가’에 대해, 철학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단서들을 여기저기에 흩뿌려 놓았다. 그들이 남겨놓은 단서들은 밤하늘에서 반짝이고 있는 총총한 별빛과도 같아서 깜깜한 밤의 어둠 속에서도 길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도록 우리를 인도해주고 있다.
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존재를 고정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존재는 ‘응시하는 존재’와 ‘응시당하는 존재’이다. 또한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존재는 ‘불안에 대한 물음을 갖는 존재 일부’과 ‘그 물음에 응답하는 존재 전체’이다. 샤르트르와 하이데거의 관점을 융합하게 되면 존재는 ‘불안해 대한 물음을 갖는 응시하는 존재 일부’와 ‘그 물음에 응답하는 응시당하는 존재 전체’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에 대해 소수-다수의 문제를 끌어다 접속하면 ‘물음을 갖고 응시하는 존재 일부’는 수적 소수인 것이고 그 ‘물음에 응답하는 응시당하는 존재 전체’는 수적 다수인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달라진다. 그것은 사회적 다수란 재코드화를 통해 재영토화를 이루어 낸, 그래서 사회적으로 주류를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에 대한 물음에 있어서는 ‘물음을 갖고 응시하는 존재 일부’가 주류이며 사회적 다수이고, 그 ‘물음에 응답하는 응시당하는 존재 전체’는 비주류이자 사회적 소수가 된다.
또한 들뢰즈의 관점에서 존재란 ‘욕망하는 기계’인 개체의 ‘멈추지 않는 욕망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 바라본 욕망은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개념에 머물러 있지 않고 지극히 현실적이라서 현실에서의 영토로 코드화를 이루어낸다.
관습적 욕망과 시대적 욕망과 같은 의식적인 욕망 이외에도 무의식적 욕망이 한꺼번에 뒤엉켜 있는 것이 욕망이기에, 욕망에서는 일정한 규칙을 찾아볼 수 없고 비방향성과 불규칙성만이 다발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욕망을 ‘폭주하는 기관차’라고 표현하고 있는 문헌들이 있지만, 그 비유는 욕망의 속성에 대한 몰이해가 빚어낸 텍스트일 뿐이다. 그것은 기관차는 선로를 따라 움직인다는 방향성을 갖고 있기에 어디를 향하는지를 알 수 있지만 욕망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안티 오이디푸스>(영어 원 제목은 <안티-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조현병><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이며 프랑스어 원 제목은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L'anti-Œdipe>이다. 1972년에 프랑스어로 첫 출간되었고 1977년에 영어로 첫 출간되었다.)에서 욕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욕망이란 무의식의 자기 생산을 말한다. 욕망은 어떤 것도 결여하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욕망은 자신의 대상을 결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존재에 대한 문제는, 존재에 대한 물음을 갖고 응시하는 욕망하는 기계 다수(수적으로는 소수)와 그 물음에 대해 응시당하고 있는 욕망하는 기계 소수(수적으로는 다수)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