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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

카프카와 도끼와 들뢰즈의 도끼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아나키스트(anarchist)를 ‘무정부주의를 믿거나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는 간결한 문장으로 정의하고 있다. 

'아나키스트 = 무정부주의자(無政府主義者)'라는 등식을 성립시키고 있는 이 짧은 문장은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국어사전에 공식적으로 수록된 것이니만큼 “크게 잘못된 것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젊은 날에, 아나키스트가 되기를 꿈꾸며 캠퍼스를 누볐던 누군가에겐, 하긴 그 푸르른 시절에 ‘아나키스트’라는 멋진 단어를 동경하지 않은 이가 얼마나 될까, 국어사전에 나오는 이 문장은 너무 단순하기만 해서 그 권위를 의심하게 될 만큼이나 헙수룩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아나키스트라는 단어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땅에서 생겨나서, 아주 오래전에 크고 넓은 바다를 건너고 높은 산을 넘어서 이 땅까지 흘러 들어온 ‘유입어’(외래어)이다 보니 '아나키스트가 곧 무정부주의자'라는 설명은, 지나간 시간 언젠가에 어느 누군가가, 자신의 짧은 지식을 토대로 번역한 결과물일 것이고, 그러다가 보니 다소의 의역과 오역이 그 뜻에 더해졌을 것이라는 심증을 갖게 된다. 


분명 이 번역에는, 다른 문화권에서 유입된 단어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당시 번역자가 가졌던 지식의 정도와 그렇게 번역하게 된 시대적 상황과 배경이 직간접적인 작용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런 사정으로 인해 아무리 사전에 수록된 단어라고 해도, 유입어의 경우에는 번역자의 ‘의도적인 실수’나 번역상의 ‘의도하지 않은 실수’가 그 뜻에 끼어있기 마련이란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실 아나키스트를 [무정부주의자]라고 그 범위를 국한하는 것에는 적지 않은 허점이 있다. 

아나키스트는 '아나키즘을 실현하기 위해 활동하는 이들'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좀 더 적절하다. 

여기에서 사용한 “활동한다.”라는 표현에는 “생각하고 행동한다.”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아나키스트를 [무정부주의자]로 표현한 것은, 혹은 [무정부주의자]만이 떠올려지도록 설명한 것은, 이러한 [아나키즘]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 주로 정치적인 면과 같은 특정한 면에만 치우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아나키스트를 설명하고 있는 많은 문헌들이 단지 정치적인 관점을 중심에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비단 [정부]뿐만이 아닌 [국가]와 [민족주의]를 넘어 [종교]와 같이 인간의 이성을 제한하는 체계와 [자본주의]와 같이 ‘인간의 자유 의지를 통제하거나 억압하는 모든 사회적 체제’에 저항하는 이데올로기이자 사상이다.     


아나키즘

아나키즘은 ἀν-(無, 없음)와 ἀρχός(지배자, 통치자)가 합성된 고대 그리스어 아나르코스(ἄναρχος)에서 비롯된 단어이다. 한글에서 아나키즘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은 anarchism([ˈænərˌkɪzəm])이라는 영어 단어에서 온 것이며 프랑스어에서는 anarchisme(아나르시슴)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아나키즘은 사회를 [아나키(anarchy)의 상태]로 만들려는 정치적⋅철학적 사상이다. 

[아나키의 상태]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사회를 지배하는 자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아나키는 ‘지배자가 없는’ 혹은 ‘권위에 반대하는’이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아나르키아(anarkhia)에서 파생된 것으로, 국가의 권위, 고용주의 권위 등과 같은 서열적 제도의 모든 외적 권위를 거부하는 개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배자로서 억압하는 자는 국가의 정부나 종교적 기관일 수도 있으며, 자본이나 도덕일 수도 있으며 도그마(dogma,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비판과 증명이 허용되지 않는 신념이나 학설, 교리, 교의, 교조 따위)일 수도 있다.


프랑스의 아나키스트 철학자인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Proudhon, Pierre Josep, 1809-1865)은 저서 <소유란 무엇인가?> 또는 <재산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ropriété?, 1840)에서 아나키는 모든 형태의 ‘주인과 군주의 부재’를 의미한다고 언급하였다. 프루동은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로서 1840년에 [아나키](anarchy)를 자신의 사상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아나키스트는 ‘아나키즘을 자신의 삶의 근간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이’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나키스트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무정부주의자]보다 그 범위가 훨씬 더 크고 넓다고 할 수 있으며 ‘무정부주의자는 아나키스트의 한 부류’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나키스트는 무엇이고 어떻게 번역해야할 것인가’하는 ‘아나키스트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아나키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첫 번째 단계는 [아나키스트 = 무체제주의자]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나키스트 = 무체제주의자


아나키스트를 무정부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라고 부르는 것에서 온 것인데, 그것이 아나키즘의 본질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 아나키스트들은 무정부주의자라는 표현을 꺼리고 있다. 


아나키스트는 아나키스트라고만 부르거나, 굳이 한글로 번역을 해야 한다면 [무정부주의자]라고 번역하기보다는, 모든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경제적이거나 사회적인 시스템을 거부하고 그것들에 저항하는 [무체제주의자]로 번역하는 것이 아나키즘의 의미를 좀 더 충실하게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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