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로 보면 천도복숭아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소년의 오른쪽 팔 아래에 놓여 있는 것들은 천도복숭아라고 하기엔 크기가 작고 색깔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보인다.
<과일 껍질을 벗기는 소년>에서 과일 부분
보기에 따라서는 자두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자두는 껍질을 벗기지 않고 먹는 과일이다.
또한 자두라고 하기에는 그림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과일 2개의 크기가 조금 크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이 과일이 이탈리아에서 재배되는 배 모양의 감귤류인 베르가못(bergamot)이라고도 하는데, 그림에서 소년이 껍질을 벗기는 형태가 베르가못의 껍질을 벗기는 일반적인 방법과는 다르고, 베르가못은 특유의 강한 신맛으로 인해 껍질을 벗겨서 그냥 먹는 과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서 보면 카라바조의 <과일 껍질을 벗기는 소년>에 나오는 과일에 대해서는 “이것이 분명하다.”라고 그 종류를 확실하게 지정할 수는 없지만 두 종류 또는 세 종류가 섞여 있다고 봐야할 것 같다.
소년과, 과일을 깎는 행위에 대한 해석
과일에 대한 이러한 논란은 카라바조가 의도한 것일 수 있다. 카라바조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림의 주인공인 소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림 속에서 과일을 깎고 있는 아이는 소년이라고 보고는 있지만 외모에서는 중성적인 이미지가 느껴진다.
풍속화에서는 소년을 '귀엽게'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카라바조의 <과일 껍질을 벗기는 소년>에 나오는 소년은 그렇지 않다.
좋게 얘기하자면 '청순하고 단정하게' 묘사되어 있다.
청순하다는 것은 성적인 매력을 암시하는 코드일 수도 있다.
더욱이 아이가 입고 있는 윗옷이 하얀색 천으로 만든 얇은 블라우스처럼 보이고 있어 아이를 더욱 중성적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다.
이 아이를 소년이라고 보는 것은 윗옷을 가슴 아래까지 풀어 헤쳐 속살을 보이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소녀라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이 아이를 소년으로 여기는 것에 깔려 있는 것이다.
중성적 이미지의 소년
<과일 껍질을 벗기는 소년>에 나오는 아이의 이미지가 중성적이다.
아이가 가슴을 풀어 헤치고 과일을 깎는다는 것에서 카라바조 식의 어떤 암시를 찾을 수 있다.
르네상스 예술의 관점에서 과일은 달콤한 유혹을 상징한다. 인간에게 원조가 있게 만든 ‘죄의 열매’가 달콤함 맛을 가진 과일이다.
그래서 죄의 유혹은 언제나 달콤한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달콤함은 인간이 거부하기 어려운 강력한 유혹이다.
또한 달콤한 것에 빠지게 되는 것은 여자의 원죄에서부터 시작되었기에 ‘여자 = 과일 = 달콤한 유혹’이라는 암시적인 메시지가 본능과도 같이 인간에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림 속의 과일들이 어떤 종류이건 간에 카라바조는 이것들을 먹음직스럽게도 달콤하게도 그리지 않았다.
좀 더 탐스럽고 먹음직스럽게 그릴 수도 있었겠지만 카라바조는 그러지 않았다.
이 과일이 신맛이 강한 베르가못이라는 주장에는 이러한 관점이 연결되어 있다.
이 과일들은 이솝 우화의 여우와 포도에 나오는 ‘덜 익어서 신맛이 나는 맛없는 과일’일 수도 있다.
“덜 익었다.”는 것은 그림 속에서 과일을 깎고 있는 주인공이 아직 어린 아이라는 것과 연관시켜 볼 수 있으며 또한 껍질을 벗겨낸다는 것은 죄를 벗겨내는 의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아직 죄의 싹이 덜 자라란 아이가 덜 달콤한 과일(죄의 열매)의 유혹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며, 아이가 중성적이라는 것은 인간이 달콤한 유혹에 빠진 것은 비록 여자에게서 시작된 것이긴 하지만 결국에는 남자와 여자, 인간 모두의 원죄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과일 껍질을 벗기는 소년>이 그려진 1592년 – 1593년에 이십대 카라바조의 신앙적 성숙도가 이것을 인지하고 자신의 작품 속에 암시적으로 표현할 단계에까지 이르렀는지는 의문이다.
따라서 이 견해를 일반화시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수 있다.
이 그림을 그린 이유가 ‘개인적인 판매’를 위해서였기에 이런 식의 종교적 의미를 담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저잣거리에서 판매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면, 아이를 중성적으로 묘사한 것은 단지 구경꾼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였을 것이며 과일들을 덜 먹음직스럽게 그린 것은, 그림을 그릴 당시 카라바조가 잘 익은 과일을 구할만한 경제적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