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카라바조: 부활하는 로마

로마의 카라바조: 부활하는 로마

카라바조는 1592년 중순경에 당대 최고의 화가가 되겠다는 야심찬 꿈을 안고 로마에 도착했다.

그의 로마행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버전의 이야기가 전해지고는 있지만 분명한 것은, 카라바조가 로마로 가게 된 것은 화가로서 성공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당시 로마가 모든 예술가들에게 ‘성공을 꿈꾸게 하는 꿈의 도시’였다는 것은 로마의 인구 분포에서 예술가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비율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다.

카라바조가 살아가던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당시 로마의 전체 인구가 약 십만 명 정도였다는데 그 중에서 약 이천 여명이 예술가였다고 하니, 로마 인구의 약 2%가 예술가였던 셈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인류의 역사에 있어 다시는 찾아볼 수 없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지금의 뉴욕이나 런던, 파리가 아무리 ‘예술의 도시’라는 이름으로 불리고는 있지만, 예술에 있어서만큼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까지 로마에서 벌어졌던 현상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당시 로마는 그야말로 예술의 도시 그 자체였고 로마의 거리와 뒷골목에는 성공을 꿈꾸는 예술가들로 온갖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문헌에 따라서는 당시의 그들에 대해 ‘예비 예술가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도 있는데, 그것은 단지 그들 대부분이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쳐 보일 수 있는 기회를 미처 잡지 못했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당시 로마로 흘러들어온 그들에게 ‘예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예술가로서 충분한 실력을 갖춘 ‘전문 예술가’들이었기에 자신있게 로마를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예술의 도시 로마에서의 상황은 그들이 기대하던 것과는 달랐다.

그들은 비록 커다란 꿈을 안고 로마에 발을 디뎠지만 자신의 이름을 넣은 ‘제대로 된 작품’을 제작할 기회를 잡지 못한 채로 전전긍긍 어렵게 생계를 이어나가야만 했기에 ‘예비 예술가’라고 불리는 신세가 된 것일 뿐이다.

카라바조가 도착한 로마에는 그런 예술가들이 어느 곳에나 늘려 있었다.

로마의 부활, 1590년대의 로마

16세기 말에 새로 선출된 제231대 교황 클레멘스 8세(재위: 1592년 1월 30일 - 1605년 3월 3일)는 ‘가톨릭 신앙의 부활’을 상징하는 의미로 로마의 교회들을 부활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그 일환으로 로마 곳곳에는 새로운 교회들이 지어졌으며 오래되어 낡은 교회들은 리모델링되었다.

이에 교회의 내부와 제단을 장식할 그림과 조각작품들이 그 어느때보다 많이 의뢰되었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몰려든 수많은 예술가들은 교황청(바티칸, Vatican city)에서 약 20분 거리에 떨어져 있는 티베레 강(River Tiber)의 동쪽 지역인 포폴로 광장(Piazza del Popolo)과 스파냐 광장(Piazza di Spagna, 스페인 광장) 사이의 넓지 않은 지역에 거주하면서 그들의 출신지에 따라 각기 별도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공동체들과 그 구성원들이 하나의 구역에 한꺼번에 거주하게 되면서 공동체들 사이에서, 그리고 개별 예술가들 사이에서 분쟁과 경쟁, 불화와 복수 같은 일이 다반사로 벌여졌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지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당시의 이탈리아는 지금과 같이 중앙집권적인 하나의 국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역마다 각각의 세력들이 그들만의 왕국이나 공국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이 공동체와 개개인 간의 반목에 커다란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메트로폴리탄 로마는 원래부터 로마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들 이외에도 오직 ‘권력의 쟁취’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탈리아 전역에서 몰려든 권력형 성직자들과 귀족들, 신성을 쫓아 구원을 추구하며 몰려든 순수한 종교 사제들과 순례자들, 그리고 성공과 명예를 좇아 몰려든 예술가들과, 더 커다란 금전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부유한 상인들, 바티칸에 고용된 용병들과 같은 이주민들이 ‘로마인’이란 이름으로 뒤엉켜 살아가고 있던 거대한 메트로폴리탄이었다.

그런 환경으로 인해 로마인들의 사회적 신분은 다른 봉건주의적 체제가 지배하고 있던 사회시스템에서보다는 훨씬 유동적이었다.

다른 왕국들이나 공국들에서라면 몰라도 적어도 로마에서라면, 자신의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면, 그리고 언젠가 기회를 잡게 된다면, 누구나가 현재의 신분을 넘어 커다란 명예와 성공을 쟁취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물론 비록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누구나가 그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로마에서라면 그 기회를 잡을 확률이 다른 사회시스템에서보다는 훨씬 더 높았고 또한 그 기회는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로마를 살아가고 있던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당시의 로마는, 현재의 뉴욕이 그런 것처럼, 예술가들에게 ‘꿈을 꾸게 만드는 도시’이자 ‘잠들지 않는 도시’였고 그만큼 역동적인 사회였다.

당시 로마의 그런 환경은 로마를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부정적인 것에 빠지게도 만들었다.

로마로 흘러든 사람들은 부와 명성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그것이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금지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못할 짓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16세기와 17세기 당시 이탈리아 반도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이 살아가던 곳을 떠나 로마로 간다는 것은, 오늘날로 치자면, 태평양이나 대서양을 건너 멀고 먼 다른 나라로 이민을 떠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힘든 일이었다.

오늘 날의 이민자들이 그런 것처럼 당시 로마로 흘러든 사람들의 가슴에는 이주민으로서 ‘로마 드림(Rome Dream)’이 안겨 있었다.


자신이 살았던 곳을 완전하게 떠나온 이상, 어차피 어느 누구도 원래 살았던 곳에서의 자신에 대해서는 알 수 없을 테니, 지나간 일들은 상황에 따라, 자신의 주관과 형편에 따라, 적당하게 부풀리고 채색하면 될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들은 가면을 쓴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양손에는,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자신을 얼굴을 가릴 수 있는 사회적 가면들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부활하는 로마는 예술가들에게 기회를 부여하고 있었다. 로마로 몰려든 예술가들 대부분은 그들이 이미 성취한 것보다 더 크고 많은 것들을 이루어내기 위해 반목하고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 자신의 신분을 가장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다른 예술가들을 비난하고, 자신의 실력을 과장하여 표현하기 일쑤였다.


그들의 입을 따르면 그들 모두는 원래부터 좋은 집안의 출신이면서 좋은 화실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대단한 실력을 소유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 대부분은 지어낸 것일 뿐이며, 물론 그 중에는 다소의 진실이란 것도 혼재되어 있긴 하겠지만, 과장과 허풍일 뿐이라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었다.

현실에서의 그들은 보잘 것 없는 삶을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기에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쏟아내는 타인의 이야기들에 굳이 귀를 기울여야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술가로서의 실력뿐이었다. 하지만 그 실력이라는 것조차 성공을 쟁취하지 못한다면 한낱 잔재주로 취급받기 일쑤였다.


뉴욕에서, 고일석(Dr. Franz 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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