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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신학에 대한 어느 호모 사피엔스의 사색

철학과 신학에 대한 어느 호모 사피엔스의 사색

                        

그들은, 그들 자체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절대적 존재>를 추종하게 되었다. 그들이 <절대적 존재>를 추종하는 것은 ‘그래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결국 그들에게 있어 무언가를 추종하는 것은 그들의 ‘본능’을 따르는 당연한 행위일 뿐이다.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그들에게 있어 <절대적 존재>란, 불완전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는 '자연계에서의 무엇' 중에서, 그들을 감시하고 경고하며, 판결하고 벌을 주며, 축복하고 돌봐주는 것처럼 보이는, 그렇다는 믿음을 갖게 만드는, 물리적으로는 직접적인 대면이 어렵기는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분명 그러하다.” 또는 “인지하고 있다.”고 믿었던, 절대적인 권능을 가진 것 같은 영험하고 두렵기 짝이 없는 그 무엇이었다. 


그들이 세상에 출현한 태초부터 그들 자신에게 심겨져 내려오고 있는 막연한 경외심과 혼돈이 그들이 <절대적 존재>를 추종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바로 우리라는 '인간' 무리의 선조들이다.


―――――― α ――――――    

 

언젠가부터 인간의 인지적, 철학적 사고 능력의 향상은 이 <절대적 존재>란 게, 이 세상을 예비하고 창조하였으며, 원시 태초부터 이 세상을 관리해온 <신(God)>이란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또는 그러한 추측을 “분명 그랬었다.”는 사실로 믿게 되었다. 

또는 사회를 이루고 결속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삼기 시작하였다. 

그로서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거룩한’ 것을 표현하는 신성(神聖)이 등장하여 그 세력을 점차 키워나갔다. 


그날 이후, 신성에 귀를 기울이고, 신성에 기인한 세상의 원리를 추적하며, 신의 대리인이자 제사장으로서 무지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무리를 이끌 의무와 권한을 부여받은 이들이 세상 곳곳에서 나타났고, 그들이 신을 대리하여 인간의 무리를 이끌어갔다. 

이러한 <신성의 시대>는 지금의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길었을 수 있다. 


인간의 사유는 이 신성을 ‘종교적 현상의 본질적인 특징으로 본 관념(觀念)’이라고 규정하게 되었다(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켐). 

신성은 이 세상에 배치되어 있는 온갖 비속한 존재들과는 구별되는 관념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신성과의 소통하기 위하여서는 그 신성을 따르고 있는 무리에 의해 정해진 특별한 절차가 필요하며, 만일 누군가 또는 그 무엇이 신성을 침범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 신성이 가진 권능에 의해 초자연적인 제재를 받게 된다고 한다. 


 ―――――― α ――――――     


이 <절대적 존재>에 대한 사피엔스 사피엔스적인 사유는 점차 신성적인 문제와 철학적인 문제라는 두 갈래 길로 나뉘어 진화하게 된다. 

그 진화의 결과물인 <신학>과 <철학>은, 한 뿌리에서 돋아나서 같은 하늘을 향해 자라났지만, 언젠가부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게 된 두 개의 줄기인 셈이다. 


따라서 <신학>과 <철학>의 귀결은, 태초의 뿌리와 같이, 같은 곳을 향하고 있으며 그 둘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대해 포함 관계라든가 충분조건에 있질 않고, 어떠한 시야로 서로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철학적 신학>과 <신학적 철학>의 형태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둘에 대해서 얘길 하게 되면, 세속의 귀에는 궤변처럼 들릴 수도 있을 만큼, 아주 복잡하고 기묘하기 짝이 없어 행여 실없는 이로 비칠 수도 있게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으냐.”라든가 “어느 정도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와 같은 문제와 그것의 정도는 믿음을 가진 이와 그렇지 않은 이가 완전히 다르고, 대상자가 <철학>과 <신학>에 대한 지식을 얼마만큼이나 가졌고,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는 폭과 깊이에 따라 다르게 된다.      


어쨌든 그것들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얘길 하자면 다음과 같다.    

<철학>은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이성적인 사고의 영역에 바탕을 두고 있는 반면에 <신학>은 믿음이라는 추상성의 관념적인 영역에 자리를 잡고 있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라는 것은 "비록 복잡한 면이 있긴 하지만 상당히 이성적으로 보인다."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고, 추상적이란 것은 "논리적으로는 간단하게 보이지만 상당 부분 비이성적인 면이 있다."는 것과 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표준국어사전에서는 관념(觀念)이라는 단어를 ‘현실에 의하지 않는 추상적이고 공상적인 생각’이나 ‘사고(思考)의 대상이 되는 의식의 내용, 심적 형상(心的形象)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과 <신학> 사이에는 태생적인 연결고리가 존재하듯이, 성장에 따른 커다란 간극이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된다. 

또한 여기에는 "간극이 무엇이냐."와 같은 간극의 자체에 관계된 문제와 "간극이 넓나, 좁나"와 같은, 단순해 보일 수도 있지만 아주 복잡한 문제가 존재하게 된다. 


 ―――――― α ――――――     


<천한 신학자>와 <천한 철학자>는 그 간극을 더 크게 벌린 <허위의 공간>을 만들고선 그 안에서 ‘신성’과 ‘세상의 본질’을 찾았다고 일반 대중을 선동하고 현혹하고 있다. 

과거의 세상에서도 그러한 인간들이 존재했었던 것처럼 지금의 세상에서도 또한 그러하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아무리 진화와 진보를 거듭한다고 해도 본질에 있어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비록 그들의 선동에 넘어간 이들이라고 해서 단지 '우매하기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우매함은 <개인이라는 소개체(小個體)>가 무리를 지어 형성하는 <대중이라는 대개체(大個體)>에게 유전되어 내려온 하나의 속성일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현명한 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대중이라는 무리 속에 속하게 괴면, 또는 갇히게 되면, <선동과 현혹>이라는 작은 당근에도 침을 흘리며 쫓아다니게 되는 것이, 한낱 바람 앞에 선 늦은 가을날의 마른 갈대와도 같이 버석거리는 것이 우리라는 인간이 가진 본성이다.


그들의 공허한 선동과 현혹은 철학과 신학을 상호 배타적인 관계로 만들고 있지만, 그 둘을 철저하게 떼어내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태초의 케이아스 속에서 부족함을 내재한 채 태어난 우리라는 인간 개개인은 그것을 제대로 구별하기 어렵다.  


뉴욕에서, 고일석(Dr. Franz 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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