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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반성과 이성에 대해

인간의 반성과 이성에 대해                        


인간은 반성이란 걸 하기 때문에 이성적인 존재인 것일까, 이성적이기 때문에 ‘아주 미약하나마’ 반성을 하게 되는 존재인 것일까. 

반성이란 것이 지닌 정성성은 주관의 개입을 허용하기 마련이라 그 정도가 가진 크나큰 간극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 봤을 땐 그 정도면 괜찮다.”는 문장을 마음과 생각에 덧칠함으로써 ‘행위나 생각과 같은 반성해야 할 대상’을 덮어버리는 교묘한 술책을 부리게 한다.    


반성을 일반화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기는 하지만, 시도나 시늉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반성에 대한 이성의 임계치(문턱값, threshold value)]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게 된다. 


사람에 따라 또는 주어진 여건에 따라, 시대적 환경과 사회적 여건에 따라 전혀 다르게 접근해야 수는 있겠지만 임계치란 것은 ‘그 정도라면’ 그것이라고 인정해도 될 만하거나, ‘그 정도면’ 그러하다고 받아들여도 될 만한 것 같은, ‘포용 가능성’을 판단하게 만드는 정성적이거나 정량적인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반성에 있어 임계치의 개념을 적용하게 되면, 일정한 정도의 값, 즉 임계치를 넘어선 반성은 반성이라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그 값을 넘어서지 못하는 반성은 반성이 아닌 것이 된다. 

이와 같이 반성에 끼어든 임계값은 반성 또한 흑백논리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게 만든다. 

또한 임계치의 경계쯤에 도달한 반성에 대해서는 ‘반성인 것 같긴 하지만 반성이 아닌 것도 같은 반성, 또는 반성이기도 하고 반성이 아니기도 한 반성, 그래서 아주 어정쩡한 반성’이라 할 수 있게 된다. 


―――――― α ――――――


반성은 또한 진정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또는 어떤 것에 대한 반성을 ‘진정성을 가진 것’으로 여기느냐 아니냐는 문제는 그것에 대해 허용하고 있는 임계치의 다소 또는 정도에 따르게 된다. 

여기에서 ‘다소’와 ‘정도’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반성이란 것이 정성성을 가진 것이기도 하지만 정형성 또한 지니고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반성이 진정성을 갖기 위해서는 그것을 반성이라 받아들일 수 있는 임계치를 훨씬 넘어선, 그래서 과장으로 보일 수도 있을만한 행동이나 표현이 ‘반성하는 마음’과 함께 표출되어야 한다. 

반성의 이런 특징은 내향적인 사람의 반성이 외향적인 사람의 반성보다 진정성이 부족한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허술한 여지를 만들고 있다.    


―――――― α ――――――


마음의 잠자리를 뒤척거리며 침대 위를 뒹굴거리고 있는 오늘의 늦은 시간, 돌이켜 보게 되는 것들이 괜히 많아진다. 

뒤돌아보는 것이 많아진다는 것은 반성할 것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어쩌면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반성하는 존재’일 수 있다. 


잠자리를 뒤척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지나간 시간 속에 갇혀있었던 일들이, 마치 거울 두 장을 마주보게 만든 것처럼 무한하게, 재귀적으로 불려 나오게 된다. 


검은 어둠에 갇힌 밤안개에 눅눅해진 이성이 임계치를 이만치 낮추어 버렸으니 꿈자리가 뒤숭숭해질 것이 분명하다. 밤의 어둠은 낮의 이성이 매겨 놓은 임계치를 쓸데없이 낮아지게 만든다. 

젠장, 그럴게 뭐람. 


내일은 새벽 첫 바람의 냉랭함과 첫 빛의 건조한 붉음으로 식은땀 흘리다 깨어날 긴 밤의 이성을 말려야겠다.

그리고 그 이성의 짧은 반성에 진정성을 듬뿍 부여해야겠다. 그래야만 마음 편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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