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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벗어난 어느 집시 이야기

계절을 벗어난 어느 집시 이야기                        

어느 날, 자신이 속해 있었던, 또는 속해 있었다고 믿으며 살아가던 무리에서 이탈한 어느 집시 하나가, 다른 계절을 찾아 혼자서 길을 떠났다고 한다. 

그날에 있었던 그의 행위에 대해 어떤 이는 ‘길을 떠난 것’이라고도 하고, 다른 어떤 이는 ‘길에 나선 것’이라고도 한다. 

또한 그때의 이탈을 ‘타의에 의한 탈락’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고, ‘자의에 의한 탈출’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자의에 의한 것이든 타의에 의한 것이든, 그것이 탈출이든 탈락이든, 누가 뭐라고 하든지 간에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그는 이미 그들의 무리를 벗어났으니깐.”


아주 우연하게도, 그것을 단지 ‘우연’에 의한 것이라고만 얘길 하기에는 납득시키기에 어렵고 설명하기에도 뭣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내가 걸어가고 있는 여정 또한, 무리를 벗어나 걸어간 그의 족적을 따라 걷게 되었다.


“아마도 바람이었을 것이다. 그가 몸에 걸친 것이라곤 마른 풀잎처럼 버석거리는 허름하고 낡은 천 조각 한 장뿐이지만 그의 행색은 결코 남루해 보이지 않았다는 말을 은밀하게 전해 준 것은.”


지나는 길에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는, 아마 그게 그였을 거라고 얘길 하는, 몇몇 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기도 하였다. 


“혹시 그의 이름을 아십니까.”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이름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라는 지시대명사로만 불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그는 그저 ‘그’라고 하는 외자로 지칭될 뿐이었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모종의 신비주의를 추종하고 있는 신비주의자일 수도, 또는 어쩌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가져본 적이 없는 ‘진정한 무명씨’이거나, 또는 사회적 체제로부터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지워버린 아나키스트일 수도 있겠다는 추측을 합리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 α ――――――     


어떤 이는 말하였다. 

그는 해지는 들판 가장자리에 퍼질러 앉아 세월의 땟자국이 자욱하게 끼어 있는 낡은 기타를 튕기면서 슬픈 곡조의 노래를 뽑아내었었다고. 

그것도 지나는 바람의 심금조차 울려가며 아주 구슬프게 불렀었다고. 


또 다른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결코 비를 피하지 않고 그냥 걸어갔다고. 

그것도 아주 엄청난 소나기 속에서 그랬었다고.


그리고 누군가는 보았다고 말했다. 

빗물이었는지 땀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물기가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었다고. 그리고 아마 그것 때문에, 그의 체온이 실린 물안개가 그에게서 모락모락 피어올랐었다고. 

분명 그에게서 아지랑이와도 같은 물기의 증발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였었다고.


그와 잠시나마 말을 섞은 적이 있다는, 그게 그였음이 분명할 거라고 기억을 더듬으며 말한 누군가는 노랫가락 같은 그의 말을 이렇게 전하였다. 

     

길을 떠난 집시 

    

집시는 자신의 운명을 알아야 하지

집시는 자신의 운명에 순응할 줄 알아야 하지

     

집시는 노래를 부를 줄 알아야 하지 

집시는 소리 없이 울 줄 알아야 하지

집시는 춤을 출 줄 알아야 하지   

   

집시는 슬픈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하지

집시는 길을 걸어야 하지

길을 떠나야만 하는 것이 집시의 숙명이지


집시는 바람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아야 하지     

집시는 혼자 걷는 외로움쯤이야 

잠시 곁을 지키는 길벗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하지 


집시는 다른 계절의 향기를 

스쳐가는 바람결에서도 맡을 줄 알아야 하지


―――――― α ――――――     


그것이 언제 적이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분명 그가 이 길 어딘가를 걸어 지나갔었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다. 

느낌에는 뒤늦음이란 게 없고 무엇인가에 대한 느낌이란 것에서는 원래 뚜렷한 이유를 찾아내기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 느낌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주절거릴 필요가 없는 법이다. 

 

‘그것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주관을 세상의 객관으로 만드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혹시 느낄 수 없는 경우라면 ‘느꼈다고 그냥 믿으면’ 될 뿐이다. 

어떤 것을 느낄 수 있다면, 또는 느꼈다고 믿게 되면, 그것에게는 객관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해도 괜찮다. 

누군가에게서 행여 원망 들을 일 따위는 무시할 수 있을 것이기에.


‘그것을 느끼는 것’이면 충분하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그’라고 불리는 그 집시가 걸어간 길을 좇아야만 하는 이유는 가슴에 차고도 넘친다.


“이 길의 저기 앞 어딘가에서 바람과 세월의 골을 헤집으면서 그가 아직도 걸어가고 있다. 느낄 수 있다. 이 길은 그도 나도 자의에 따라 오른 진정으로 자유로운 길이라는 것을. 길가에 자잘하게 피어난 키 작은 들풀마다 저마다의 아름다운 꽃을 송이송이 피어낸 향기로운 길이라는 것을.”


그가 찾으려는 계절과 내가 찾아가는 계절은 분명, 행여 잠시 벗어나게 되는 일은 생겨날 수도 있겠지만, 이 길 위의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그도 나도 지금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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