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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책들을 뒤적이다가, 책장 앞에 서서

오래된 책들을 뒤적이다가, 책장 앞에 서서

창 맞은 편 벽면에 서 있는 책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선반 가득 꽂혀 있는 이 책 저 책을 마음 가고 눈길 가는 대로 만지작거린다. 

멈춰선 것만 같은 곳에서도 시간은 제 나름의 방식대로 흘러간다.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한, 짧지도 않고 길지고 않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을, 겹겹의 막을 이루어 내려앉아 있는 먼지를 ‘훅, 훅’ 입김으로 닦아내다가, 문득 손가락 끝을 끌어당기는 책 한 권을 살며시 끄집어 내어 어릴 적 동네 골목길을 두 팔 커다랗게 휘적거리며 돌아다닌 것처럼 이 문장 저 문장을 읽어 가다 보니, 비록 세월의 변색 작용을 비켜서지는 못했지만 그 시절의 모습으로 아직 거기에 남겨져 있는, 여태 지워지지 않은 채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몇몇의 문구가, 일찍 깨어난 새벽의 먹물 같은 상념처럼 먹먹하게 번져나가는, 그래서 가슴 아파지는 시간에 빠져들게 된다. 


작은 떨림 하나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문장들 또한, 언젠가는 시간의 변성 작용이 가해졌을 것이고, 거기에 더해진 왜곡과 채색으로 인해, 분명 그 시절의 그것이었기는 하지만 이젠 그것이 아닐 수도 있는, 그래서 분명 익숙한 것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막상은 어색하기만 한 그 무엇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는, 사람을 울컥하게 만드는 느낌에 빠져들게 된다.


시간이 지나며 여러 가지 감상적 작용들이 그것들에게 가해졌겠지만 점차 윤곽을 세워나가서, 언제인가부터는 그 글들을 처음 읽었던 때의 내가 필시 그 글 속의 주인공이었을 거라는, 주인공이었음이 틀림없다는 환상을, 풀숲 가장자리에 자리 잡은 작은 들짐승의 은밀한 똬리처럼 새겨놓게 된다. 


이와 같은 정신적인 작용과, 그것으로 인해 생겨난 결과물들에게 때깔 좋은 포장을 입혀 보게 되면, 그 글에 스며든 애정이란 효모가 원래의 글을 잘 숙성시켜가는 과정과, 그것을 견뎌내는 인내의 과정이 제 알아 스스로의 조화를 이루어 낸 것이라고 설명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에서 원래의 글에 가해진 변이가 행하는 여러 가지 복합적이고 부수적인 작용들에 대한 논의는, 예를 들면 감성적이고 감상적인 작용과 같은 것들에 대한, 이 글이 걸어서 가고자 하는 길과는 다른 방향일 수 있기에 우선은 논외로 하는 것이 좋겠다. 


―――――― α ――――――


글이란, 어떤 이야기를 이성적이거나 감성적인 문자의 조합과 나열을 통해 서술한 것이기도 하니, 이야기는 곧 글의 원재료이자 글이 있게 한 동기인 셈이다. 

따라서 지나간 시간을 늘어놓은 이야기 또한 글이 그러한 것처럼 변성과 숙성과정이라는 미망迷妄을 거치면서 제 나름의 향과 색을 갖게 된다. 


결국 글과 이야기는 언젠가 그곳에 있었던, 또는 그곳에 있었으면 하는, 어쩌면 그곳에 있었을 것 같은 것들에 대한 추억이나 회환 같은 것들을 먹먹하게 늘어놓는 정서적인 행위의 결과물인 것이다.        

아무튼지 간에 어떤 글에 대해 느끼는 애정의 깊이가 ‘분명 그것이긴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아닐 수도 있는, 그 이야기이자 또한 다른 이야기’를 그려낼 수 있는 단계에까지 올라선 즈음에 가서야, 그 글에 대해 늘어놓는 사사로운 의견 몇 마디에 대해 ‘행여 지식에 취한 <글주정뱅이>의 의미 잃은 중얼거림’이라는 비난을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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