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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 동화 같은 성장 소설

<소나기>, 동화 같은 성장 소설


황순원님의 <소나기>는 누군가에게 그런 부류의 글이고 세월의 흐름과 함께 향기롭게 잘 숙성되어가는 이야기이다. 

<소나기>를 알게 된 처음의 그날부터, 마치 겨울 끝 무렵의 새벽녘 산책길에서 만났던 희뿌연 물안개처럼 그 이야기 속으로 울컥 빠져들었고 지금도 그날의 걸음에 배어든 촉촉한 물기를 털어내지 못하고 있다. 


점점 깊이를 더해간 애정은 끊을 수 없는 애착으로 이어졌고 애착이 끌어낸 집착은 <소나기>에 대해 사족 한두 개를 슬며시 그려 넣고 싶게 만들었다.    

  

- 애정은 원래 이성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을 운명으로 타고나서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에는 난해한, 형이상학적인 영역에 발을 담그게 만드는 법이다. 그러니 일단 애정을 느끼게 된 대상은 구속과 피구속이 그어 놓은 경계선의 안과 밖을 걸어가는 아슬아슬한 삶을 살아가기 십상이다. 

     

일단 입 밖으로 뱉어낸 주절거림은 끊어버릴 수 없을 것 같은, 아무리하더라도 결코 끊어지지 않을 것 같은 애증의 굴레에 스스로를 엮어 버리게 만든다.   

   

<소나기>, 두 가지 관점에서의 오해

황순원님의 <소나기>에 나오는 주인공 소녀와 소년에 관해서는 두 가지의 오해를 찾아볼 수 있다. 그중에 하나는 글을 쓰는 이에 대한 오해이고 다른 나머지 하나는 글을 읽는 이에 대한 오해이다. 

<소나기>를 다시 뒤적거리다가 보면 이러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의도된 것 같이 보이는’ 몇몇 장치들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오해’라는 단어를 ‘그릇되게 해석하거나 뜻을 잘못 앎’이라는 부정적인 의미에만 연결시켜 상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글을 쓰는 이가 인지하였고 또한 글을 읽는 이가 인지할 수 있는 ‘의도된 오해’에 대해서는 ‘오해가 아니라 글의 전개를 위한 장치’라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것에 대해 “첫째는 이러이러하고 둘째는 저러저러하기에 결과적으로는 이러저러하다.” 또는 “그러하니 이러저러해야한다.”는 식으로 논리와 체계를 세워가며 명시적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때로는 몇몇 암시만으로도 글이 품고 있는 은밀한 의도를 이해하기에 충분할 수 있는 법이다. 


―――――― α ――――――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나 황순원님의 <소나기>를 흔히 또는 간혹, 마치 ‘어른들을 위한 동화’인 것처럼 얘기하곤 한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라거나 “한낱 난센스(nonsense)와 같은 얘기라서 구태여 귀 담아 들을 필요 없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분명한 것은 행여 <소나기>와 <어린 왕자>, 이 두 작품을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고 딱 잘라서 말하게 된다면 작품에서 찾아지는 기성세대의 흔적에 대해 어떤 설명을 늘어놓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 어쩌면 암시적으로 남겨진 그러한 장치들이 ‘동화는 아니지만 동화 같은 이야기’에게 ‘마치 동화 같은 느낌’을 의도적으로 부여하려고 하는 것일 수 있다. 


 ―――――― α ――――――


아이들을 위한 글이라고 하면 흔히 동화童話나 동시童詩를 떠올리게 된다. 

동화의 사전적 개념은 ‘어린이를 위하여 동심(童心)을 바탕으로 지은 이야기’이고 동시의 사전적 개념은 ‘주로 어린이를 독자로 예상하고 어린이의 정서를 읊은 시’이다.


동화와 동시에 대해 오래전부터 가졌던 의문은 “기성세대인, 어쩌면 중년이거나 노년일 수도 있는, 글을 쓰는 이가, 어떻게 어린이의 마음으로 어린이의 글과 시를 쓸 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물론 책이란 게 책임이 따르는 행위로부터 이어지는 하나의 결과물이기는 해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글’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쓰고 책으로 만들어 낼 수는 있다.      


비록 그들이 쓴 글이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어린이의 정서를 읊은 것’이라는 말로 보기 좋게 포장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글을 쓰는 기성세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지나간 날의 회한이나 자기가 이루지 못했던 어떤 바람 같은 것을 자신의 어린 시절의 추억 몇몇과 거기에서 파생된 이야기 속에 풀어내는 것뿐이지 않을까. 


게다가 실제로도 그런 글의 상황과 내용을 곰곰이 짚어가다가 보면 위에서 그런 것들과 연관된 것 같은 부분들이 연이어 발견되는데, 어째서 그런 글들을 ‘어린이를 위한 것이고 어린이의 눈과 어린이의 정서로 쓴 것’이라고 하는 것인지, 독자들을 미혹시키려는 기성세대의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닌지, 의아한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혹시 아이들의 마음은 이러이러할 것이라는 어렴풋한 추측이나 아이라면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기성세대로서의 바람, 또는 채색되고 변형된 어린 날의 추억을 마치 현실에서도 있었어야만 하는 것으로 만들려는 주관적인 우愚를 산문과 운문으로 담아낸 것을, 동화나 동시라고 일컫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 다시 <소나기>에게로 돌아가 보자. <소나기>에 나오는 두 주인공은 ‘어린이’라고 불리지 않고 소녀와 소년이라고 불린다. 

게다가 이야기의 전개는 소녀의 관점에서라기보다 소년의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소나기>는 ‘어느 소년의 동화 같은 이야기’라기 보다는 ‘어느 소년의 성장 이야기’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기성세대들에게, 특히 남성호르몬이 감퇴한 남자 기성세대들에게, 황순원님의 <소나기>는 어딘가 ‘동화 같은’ 느낌을 주고 있기에 결국에는 ‘어느 소년의 동화 같은 성장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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