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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들지 않은 어른을 위한 동화

철들지 않은 어른을 위한 동화

좀 더 현실적으로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보자. 동화나 동시의 독자 대부분은 사회통념 상의 ‘그냥 아이’가 아니라 ‘어린이’이다. 

어린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어린아이를 대접하거나 격식을 갖추어 이르는 말로서 대개 네다섯 살에서부터 초등학생까지의 아이를 이른다.”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사전이 설명하고 있는 이 문장에 따르면 어린이가 곧 어린아이이고 또한 아이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에서 ‘초등학생까지’라는 말로 인해 혼란이 발생하게 된다. 

어린이의 나이 기준에 대해 여러 기관이나 사람들이 저마다의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심지어 소년과 소녀를 넘어 사춘기의 청소년 시기까지도 포함한 만 18세까지를 어린이의 기준으로 보기도 한다. 

그 폭이 너무 지나치다고 할 만큼이나 넓다. 

지나가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에게 ‘어이 거기 어린이’라고 불렀다가는 크게 봉변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행정상 [어린이 집]의 정의를 살펴보면 어린이의 범위에 대해 좀 더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어린이 집>이란 6세 미만의 어린이를 돌보고 기르는 시설을 말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즉, 나이로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인 만 6세까지가 대부분일 것이고 늦더라도 만 7세 초반까지가 어린이라는 범위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를 어린아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에 대해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조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 보고자 한다.      


“동화나 동시를 읽는 아이를 어린아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닐까.”


―――――― α ――――――


더욱 현실적으로 보자면, 동화나 동시의 독자이자 고객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어린아이들은 결코 혼자서 서점에 가질 못한다. 

혼자서는 서점에 가질 못하니 어린아이 자신이 직접 책을 고르거나 읽고 싶은 글을 뒤적거리는 경우는 아주 드물기 마련이다. 

게다가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생만 되어도 동화나 동시를 읽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초등학생은 ‘그냥 아이’이지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행여 동화나 동시를 읽는다고 해도 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위한 것이거나 방과 후 학습의 일환으로 독서논술학원에서 선정한 교육용 교재를 통한 것일 뿐이다. 

물론 전부가 그렇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이 그렇다. 

혹시라도 이와는 다른 패턴을 가진 어린아이가 있다면, 혼자서 동화와 동시를 찾아 읽는 아이가 있다면, 물론 있을 수 있겠지만, 실로 대견한 일이라고 칭찬해 주어야 할 것 같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동화나 동시를 쓰는 사람이나 어린이에게 그것을 읽게 만드는 사람은 기성세대이다. 

부모나 친척 어른이나 학교 선생님이나 학원 선생님이 그들이다.

따라서 우선 제목과 표지에서 기성세대의 눈에 띄어야 하고, 어떤 교육적인 내용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것 같이 느껴져야 하고, 기성세대의 감성으로 기성세대의 가슴을 토닥여 주어서, 그것이 자신의 어릴 적 추억이었으면 하는 아스라한 바람을 갖게 만드는 글을, 아이들을 위한 글이라도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 α ――――――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황순원님의 이야기 <소나기>의 주인공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읽느냐.” 또는 “누가 읽느냐.”에 따라 지금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중년의 남자와 여자, 또는 세월이 날린 먼지를 온몸에 한가득 뒤집어 쓴 어른 사내아이와 어른 계집아이라고 해도 이상할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처럼’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면 너무 속되게 보일수도 있겠지만 나 또한 그들 다른 사람들처럼 <소나기> 속에 나오는 터벅머리의 수줍은 사내어린이였었기를, 지나간 언젠가의 그 시절에 그런 싱그러운 성장기가 나에게도 있었기를 바라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게 짧기도 길기도 했던 살아온 시간만큼의 애증이 <소나기> 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 α ――――――


인간의 삶이란 게 어떤 주어진 운명이나, 자신이 내리는 판단, 만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게는 그것이 있어야 할 때와 있어야 할 곳이 정해져 있는 것 같다. 


때가 이르다거나 곳이 맞지 않다거나 하는 것의 발현은 뒤틀림과 변형을 일으키게 되고, 그 결과 예기치 않았던 틈새를 만들어 내게 된다. 

사람의 삶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그러한 것들이 언제 어디에서 발현될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담장 높은 곳에 숨겨져 있는 난제’라 할 수 있다. 

제 때를 찾아 제 곳에 자리 잡으려는 것 또한 사소해 보이지만 격한 갈등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소나기>에 대해 가슴에 커다랗게 깔려있는 물기 젖은 감상은, 하루 종일 걷히지 않는 숲 속 호수의 물안개처럼 때 이르다거나 때 늦은 것이 결코 아니라고, 세상을 살만큼 살아보니, 말할 수 있게 된다. 


현실적 상황이야 어떻든 간에 크게 상관할 바는 아니다. 사람이란 게 어디 이성만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던가.

감성이 이성을 누르는 순간, 어린 소년과 어린 소녀의 개울은 한 발짝 바로 눈앞에서 흘러가고 있는 현실의 것이 된다. 바짓단을 살짝 적시며 첨벙첨벙 물을 튕기면서 맘껏 깔깔거리며 그 개울을 건너가면 된다. 어쩌면 파란 하늘을 흘러가던 구름 한 줄기가 그 시절의 뒷집 계집아이처럼 등짝에 살포시 기대었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란 스스로가 스스로를 위안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연약하고도 이기적인 존재이다. 

그러기에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화자나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우리는, 비록 이야기 속의 어린 소년과 어린 소녀는 아니었겠지만, 스스로가 그려내는 비슷하지만 또 다른 <소나기> 속의 주인공일 수는 있게 된다. 


더 많은 세월이 흐른다고 해도 그리고 지금보다 더 많이 인생을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시절에 가졌을 감성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설혹 그것이 가늘고 여린 한 가닥뿐이라고 해도, 마을 어귀를 돌아 흘러가던 그 개울가에서 그 어린 소녀를 영원히 떠나보내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철없는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이야기’, 그것이 세월을 잔뜩 먹은 철들지 않은 어린 어른이 다시 쓰고 읽는 또 다른 버전의 <소나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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