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스의 신화에서 고도를 기다린다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고도를 기다린다


1.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아일랜드 출신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사뮈엘 베케트>의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그 제목과 같이 ‘기다림’이란 것에 대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What), 왜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Why), 어떻게 그것을 기다려야 하는지(How)에 대한 깊은 사색에 빠지게 된다.


오래전, 이 작품을 처음 손에 잡았을 때, 밤을 꼬박 새워 넘긴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면 작품 속의 주인공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지상에 발을 붙인 인간에게 허락되어 있고, 인간의 의지로 행할 수 있으며, 인간이기에 지닐 수 있는 유일한 미덕은, 흐르는 시간을 인내하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이성적으로 보자면 기다림에 대해 얘길 하려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언제까지 기다려야만 할지, 왜 기다려야 하는지와 같은 기다림의 속성에 대한 구체적 정황이나 상세한 기술이 함께 따라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의 기다림은 늘 결핍된 모습으로 나타나기 일쑤라서 그 어느 것도 명확한 실체를 더듬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젠가는 ‘그’ 또는 ‘그것’이 오는 그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위안 삼아 그 무언가를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지난 수 십 년간, 수많은 연극무대에 올랐고 현재도 그러하고 있는 것은 아직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고도(Godot)가 우리에게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곡 속의 주인공들뿐만이 아니라 관객이자 독자인 우리도 고도를 아직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혹시 기다림이란 물음에 이런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이라면, 그 또는 그녀는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혹자'라 불리는 무리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고도는, 과연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고도는 있어, 나는 알 수 있어, 고도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고도가 과연 이곳으로 올 것인가."

"고도는 여기로 올 거야, 반드시 올 거야. 꼭 그래야만 해."


"고도가 오게 되면?"

"..."




2.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에 대한 침묵은 강한 긍정이거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라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그 침묵의 원인이 제대로 된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언젠가 손등을 스치며 지나가던 바람이 이렇게 중얼거렸던 것 같다.


“저기 어딘가에서 고도를 본 것 같아.”

“좀 더 기다려봐. 어찌 되었건 간에 고도는 반드시 올 거야.”



그의 존재를 확인하게 될 그제야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막을 내릴 것이고, 흙먼지 잔뜩 뒤집어쓴 채 지친 다리를 두드리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도 각자의 길을 찾아 길을 나서게 될 것이다.


너무 긴 기다림은 예기치 못한 것의 원인이 되는 법이다. 어느 날부터, 연극무대에 오른 그들처럼 중얼거리는 버릇이 지어졌다.


"오늘 하루만 더 나면 돼. "

“내일이면 고도가 올 거니깐."



바위가 굴러 산 아래로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바위를 다시 산꼭대기로 굴려 올려야만 하는 무한의 형벌에 처해진 신화 속의 주인공, 시지프스에게로 생각의 걸음을 옮겨 본다.


시지프스가 돌을 굴리는 행위가 과연 벗어날 수 없는 형벌에 대한 막연한 순응인 것일까. 시지프스가 지었다는 죄를 과연 죄라고 할 수 있을까. 시지프스는 대체 왜 그런 짓을 하였을까. 그것이 신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란 걸 진정 몰랐던 것일까. 그것이 시지프스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면,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만약 그의 행위를 죄라고 인정하더라도 시지프스에게 선고된 형벌이 적절한 것일까. 시지프스에게 주어진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까. 시지프스의 침묵이 자신에게 내려진 형벌을 인정한다는 것일까.

형기 없는 형벌을 수행해야 하는 <시지프스의 신화>나 한 없이 고도를 기다려야 하는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나, 고대 그리스의 이야기나 현대 아일랜드의 이야기나, 내용을 돌이켜 보면 긴 세월이 벌려 놓은 커다란 시간의 틈새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사고 능력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


“지금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를 기다리고 있겠지”와 "지금도 시지프스는 돌을 굴려 산을 오르고 있겠지"는 다른 텍스트를 가진 같은 문장일 뿐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 속 주인공이 오늘 그리고 내일, 내일 그리고 그다음의 내일 그리고 영원히 반복될지도 모르는 내일을, 내일이면 올 것 같은 고도를 기다린다는 것이, 시지프스가 힘겹게 돌을 굴려 산의 정상으로 올려야만 하는 것과 같은 신의 형벌이 된다.


이제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과 돌을 굴리는 시지프스의 의도에 대해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고도를 기다리는 것과 돌을 굴리는 것은 그들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저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by Dr. Franz KO(고일석, Professor(Dongguk University(former))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문학, 언어의 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