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짱이와 개미 그리고 현재에 대한 단상
1.
베짱이와 개미는 자신이 타고난 운명을 따라 제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겹겹의 막으로 자신을 가린 인간의 눈에는 이 둘의 삶을 전혀 다르게 보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의 전개와 결말은 대부분 ‘적당한 만족과 대게의 체념’이란 이데올로기를 마치 조상 대대로 내려온 집안의 가훈 인양 머리 한 뼘 위 허공에 걸어 둔 것이거나, 자기만족이란 최면의 거실로 대중들을 밀어 넣기 위한 통치용 교과서에 짜깁기되어 장식된 것이거나, 글빨과 말발 강한 일부 현학자들이 자신의 지식을 자랑삼아 늘어놓은 장난질이거나, 방향을 잃은 채 고집만 센 자신의 주장에 대중의 추임새를 받아내기 위해 주절주절 늘어놓은 쓸모없는 말의 뭉치일 뿐이다.
또한 그것이, 자신이 아는 것이 곧 객관이라는 믿음에 중독되어 있는 교만한 이들이, 혼자만의 당위성을 자신의 견고한 성벽에 그것을 새겨 넣기 위한 도구의 일종임을 고려한다면,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는 분명 누군가에 의해 필요한 만큼 각색된 언어적 유희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일개미로 태어나 필사적으로 땅바닥을 기어 다니며 한 해를 살아가는 것과 베짱이로 태어나 한 철을 노래하며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 다를 바 있겠는가. 베짱이가 나뭇잎에 비스듬히 누워 노래하는 모습을, 자신이 하고 싶은 말 또는 행동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방식으로 해석하면 또 다른 왜곡인 것일까. 사실 일개미의 수명은 기껏해야 일 년일 뿐이고 우리에겐 베짱이로 알려진 곤충 또한 국가에 따라서는 여치이거나 매미이기도 하다.
일개미와 베짱이가 일으킨 생각의 바람은 벗어나기 어려운 깊고 깊은 계곡의 바위틈 사이를 불어 간다. 어느 길을 따를 것인가. 어디로 발을 딛게 되던지, 이미 지나온 곳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면, 행여 가야 할 길을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게 된다고 해도, 그것을 진정한 은혜라고만 여길 수 있는 것일까. 뒤를 돌아보는 습성을 버리지 못한 채 앞으로만 가야 한다면 어쩌면 선택이란 것도 지독한 형벌은 아닐까.
‘사람은 이러이러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우화적 선입견을 버려보자. 이왕 살아가는 세상에, 말하고 싶은 맘껏 떠들어대고, 노래하고 싶은 만큼 목청껏 노래하고, 옳다고 여기는 것을 거리낌 없이 저질러 보고, 발길 가는 대로 그냥 걸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를 헤르만 헤세의 작품 <지와 사랑(Narziß und Goldmund)>에 나오는 두 주인공인 나르치스와 골트문트에게 빗대어 보는 것도 그리 헙수룩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내면의 정신과 종교성으로 대변되는 나르치스의 삶을 개미의 삶에게, 외형적인 예술가적 기질을 대변하는 골트문트의 삶을 개미의 삶에게 이입시켜본다면, 책을 덮는 순간에 맞이했던 ‘바람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에 대한 지적 유희의 속으로 다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어쩌면, 겨울의 추위 속에 눈을 감는 베짱이의 눈빛에서, 헤르만 헤세의 또 다른 작품 <크눌프 삶의 세 이야기(Drei Geschichten aus dem Leben Knulps)>에서 ‘모든 것이 되어야 할 대로 제대로 되었다’고 신과 대화하며 삶을 마감하는 주인공 크눌프의 그것과 다른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
누군가 무엇에 대해 ‘그것이 옳다’, ‘이렇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다소 과장되게 하지만 그럴싸하게’ 펼칠 때면, 그것은 분명 어떤 목적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그 또는 그녀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해 그것의 원인을 제대로 인지해야만 한다.
대중 강연가들의 경우에는 청중의 열렬한 호응을 얻음으로써 명성을 유지시키고 그것을 통해 또 다른 강연의 기회를 얻고자 하는 것이고, 연예인들의 경우에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통해 인기를 얻고 그것을 통해 금전적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이고, 정치인들의 경우에는 대중이 듣고자 하는 것을 책임 없이 늘어놓음으로써 대중을 현혹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고 표를 얻고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되도록이면 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대중 강연가와 연예인과 정치인은 동일한 부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당연해 보이지만 곧 잘 잊어버리게 되는 얘기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정치인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가장 심하다고 할 수 있다. 정치의 목적은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오직 ‘정권 획득을 위한 자기편만의 표심 따르기’와 ‘내 편이라 여기고 있는 대중에게 정치적 환상 심어주기를 통한 득표 활동’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국민이란 ‘나에게 표를 주는 사람들’ 일뿐이고 표를 주는 그들을 위해서는 어떠한 짓도 서슴지 않으려는 몸과 마음의 준비를 굳건히 갖춘 이가 정치인인 것이다.
애초 표를 기반으로 한 정치제도 자체는, 그 표를 행사하는 이들의 ‘진정으로 성숙된 시민 의식에 따른 표심’을 전제조건으로 한 것이기에, 성숙한 시민 의식에 대한 에고적인 해석은 늘 문제를 발생시키기 마련이다. 제대로 채워지지 않은 전제조건은 오류를 발생시키고 그 결과, 우리가 민주주의라 믿고 있는 정치제도는 대개의 경우 행위적인 오류로 귀결되어 ‘대중주의’가 되기 십상이다. 표를 기반으로 한 대중정치에 있어 ‘모두를 위한 순수함’이 끼어들 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인간은 태초 케이아스(Chaos)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이니, 혼동 속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 것을.
지나온 역사를 돌이켜보면, 현재의 정치제도보다 더 잘난 현실적 규범이 어디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러면서도 인간의 역사는 앞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갔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온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개미와 베짱이의 문제는 우리의 현실이 된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느 길을 선택해야만 뒷걸음질 치는 것 같은 걸음을 이제라도 한 발짝 더 앞으로 갈 수 있을까.
결과를 누릴 이의 미성숙함을 가정에서 고려한다면 실행과 과정의 오류를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체계를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은 늘 믿어 왔다. 엉망진창 흙탕 속에서 더 고운 꽃이 피어날 거라고.
by Dr. Franz KO(고일석, 동국대교수(for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