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과 인간의 진화

호기심과 인간의 진화



1.

기억도 할 수 없는 까마득한 옛적에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역하는, 신의 입장으로 보면 분명 발칙했을 사건을 저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지된 것에 대한 호기심이 가던 길을 벗어나게 만든 것이다. 그것이 어떤 꾐에 빠진 것이건 스스로에 의한 걸린 것이건 일단 저질러진 일에는 판결이 따르는 법이다.

즉결심판의 결과는, 그때까지 인간의 땅이라고 굳게 믿고 살아왔던 곳에서의 영원한 추방이었다.


그 죄가 그리 중한 것이었을까. 추방이라는 강력한 판결이 내려진 것을 보면 그날의 판결은 ‘금지를 어긴 것’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믿음에 대한 배신’에 대한 것이었을까. 단테의 신곡을 본 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옥의 가장 깊은 곳까지 떨어지게 되는 죄가 '배신'이란 것을.


아마도 세상을 창조한 신은 피조물의 하나이자 그를 닮은 유일한 피조물인 인간이, 그의 금기를 완벽하게 지킬 것이라고 확신하였던 것 같다. 그날의 노여움은, 비록 그것에 대해 기록이 남겨지지는 않지만, 믿음에 대한 배신감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배신을 당하게 될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완벽해야만 하는 자신’에 대한 분노이기도 한 것 같다.


태초의 약속된 땅에서 쫓겨난 후에도 탑을 높이 쌓아 다시 신의 분노를 사고야 말았던 선조적의 원죄는 지금도 우리의 혈관 속에 남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원죄는 ‘호기심’이란 인간에게 부여되어 있는 지적 자각 능력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호기심 또한 애초 신에 의해 불어넣어진 것이니 신이든 인간이든, 이미 창조가 이루어진 후이니, 이제 와선 돌이킬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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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wer of Babel, by Lucas van Valckenborch, 1594, Louvre Museum


현명하게 생각할 줄 아는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에게 있어 호기심이란 결코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능력이다. 인간에게 호기심은 진화를 이끌어가는 수단이기도 하다. 창조된 인간은 호기심이란 장치를 통해 스스로를 진화시키고 있으니 창조론만을 믿으라든지 진화론만을 믿어야만 한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는 모순일 뿐이다.


그 호기심으로 인해 인간은 사물과 그것의 속성을 세밀하게 살피게 되고, 사색이라는 필터를 거쳐 그것들의 본질과 원리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진화는 생물학적인 진화만이 아니라 정신적 진화에도 있는 것이고, 그 두 가지의 진화가 조화롭게 이루어질 때 우리는 ‘인간이라는 위대한 존재로서의 진화’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호기심의 대가는 때론 아주 매서울 수도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때에 일어나는 더 강한 호기심이 그것을 견디게 해 준다는 것이다. 호기심은 심판에 이르게 하지만 그 심판의 굴레를 벗어나게 해주는 장치이기도 한 것이다. 심판을 견디며 그곳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서 앞을 향해 디딘 발걸음이 새로운 진화의 경로를 이끌어 간다. 그렇게 인간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유체적 정신적으로 진화해가는 것이다.


지금의 길을 벗어나지 않는 자,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호기심을 억누르려 애쓰는 자, 한 발짝 옆길로 내려서길 두려워하는 자는 결코 이런 진화의 여정을 제대로 따를 수 없게 된다. 진화하지 못하는 자의 영혼은 언젠가 영원히 소멸하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 진화란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생성되고 얻어지는 결과물이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의 진화를 인식할 수 있는 자가 가장 아름다운 인간인 것이다.

인간은 호기심에 의해 진화하게 되고, 그 진화의 여정을 걸으면서 내적으로 성숙해지는 존재이다.



2.

새로운 것이나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쫓아다니는 것은, 허락한 적이 없는데도 내 몸 어딘가에 심겨 내려온, 테두리 없는 호기심 때문이다. 이 실체 흐린 감정이 막연히 커져 가다 보면, 분명 언젠가는 어떤 짓을 저지르고 말 것이란 것을, 그것이 운명이라는 것을 언젠가부터 직감하고 있었다.


그럭저럭 아무런 탈 없이 잘 살아가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별 다른 낌새가 없었는데도 불쑥 끼어든 오후의 바람기처럼, 그렇게 하게 되면 분명 많은 것들로부터 멀어질 것이란 것을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입안으로 기어 들어온 까칠한 그것을 그냥 물고 있기에는 뭣하기도 해서, 내 안으로 꿀꺽 삼켜버렸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새롭게 가야만 할 길이 부린 가벼운 사술邪術의 일종이었을 뿐인데도 어리석기만 한 나는 그날, 그 간교奸巧에 걸려든 것이었다.

막상 어떤 것을 판단하자면 이것저것 따지는 것이 많고 이성이란 것을 앞세우길 좋아하는 내가 그렇게 쉽사리 빠져든 것을 보면, 어쩌면 그것을 마치 오랫동안 기다리던 고도(Godot)라고 여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이전의 것으로부터 완전히 새로워진다는 것은 아님을 알기는 하지만, 그것을 새벽의 숲 속에서 빠져버린 미망 같이, 뿌옇기는 하지만 분명 새로운 무엇이라고 느꼈던 것일 수 있다.

스스로의 위안은 인간을 인간으로 살아가게 해주는 위대한 장치이다. 나의 해석 기관은 그날과 그즈음에 있었던 일단의 일에 대해서 ‘그렇게 느끼려고 노력했다’ 또는 ‘그렇다고 느낀 것 같다’는 것을 ‘그렇게 느꼈다’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여기기로 결정했다.


선택이었건, 어쩔 수 없이 내몰린 것이었건, 어차피 호기심을 따라 길을 나선 마당에야 그것에 둘러쳐진 이성의 막을 걷어버리고, 그것을 본능이라고 받아들여, 바람이나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일을 행여 만나게 된고 해도 결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에게 운명이란, 어느 정도는 예정되어 있는 길을 조심스럽게 걸어가면 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니 호기심을 따라 길을 내려선 것이나, 길을 거슬러 오르려는 것은 운명에 대한 반항이고 신에 대한 도전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길을 내려 선 이상에는 운명이 가진 그런 속성 따윈 그리 개의할 바는 아니라고 여겨야 한다.

이리저리 걸어가는 이 길이 태초에는 예비되지 않았던, 생각하는 인간만을 위한 진화의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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