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적인 기타리스트인 잉베이 맘스틴의 연주곡 ‘태양을 넘어 먼 곳으로(Far beyond Sun)’를 듣고 있으면 그의 또 다른 명곡인 ‘이카루스 드림 팡파르(ICARUS Dream Fanfare)’를 찾아 듣게 된다.
ICARUS Dream Fanfare: https://youtu.be/2rF5Kvr9pVo
Far beyond Sun: https://youtu.be/TbHc5i4O2tc
ICARUS Dream Fanfare가 밀랍으로 새의 깃을 붙여서 만든 날개를 등에 달아 붙이고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 오른 이카로스와 그의 아비 다이달로스의 이야기에 대한 음악적인 묘사라면, Far beyond Sun은 태양을 넘어서 날아간 이카로스의 환희와 벅찬 심장의 박동을 스케치해낸, 믿을 수 없을 만큼이나 아름답고 황홀한 작품이다.
여기서 전해져 내려온 얘기와는 다른 한 가지의 상상을 해볼 수 있다. 이카로스의 날개는 그의 아비인 다이달로스의 경고나 세상에 이미 그랬다고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태양에 가까워져서도 녹아내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오히려 태양을 넘어서서 더 높고 더 먼 곳까지 이카로스는 날아올랐을 것이라고.
밀랍을 붙여 만든 날개로 하늘을 난다는 이야기나, 그 날개로 뜨거운 태양까지 날아올랐다는 이야기나,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 대해 ‘단지 상상이 낳은 허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혹자들은 말한다. 사람의 믿음이란 가슴에 있는 것이지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음에 대한 질문은 우문愚問의 일종이니 현답賢答을 찾으려는 짓은 부질없을 뿐이다.
혹시 신화나 설화 속에서 어떤 증거를 찾으려는 이성적인 습성을 지닌 이라면,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과 세상이 만나는 저 가물한 곳을,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아주 느리게 바라보기를 권하고 싶다. 그럴 때면 저기에서 무언가를 꼭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그래야만 어떤 의미가 찾아질 거라는 생각 따위는 자신의 발아래에 내려두는 것이 좋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그 또는 그녀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동일한 절대치 만큼이 동일한 단위 속에서 흘러갈 뿐이다. 느려진다는 것은 감상적 가치의 변화에 기인하는 현상일 뿐이지만,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더 큰 자유와 포만감을 안겨주게 된다.
이제 무엇이 보이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가슴에게 물어볼 때이다. 스스로의 나긋한 속삭임이 들리게 될 것이다. 그 얘기가 무엇이든지, 어떤 목소리로 어떤 투로 말을 붙여 오든지, 그것을 믿어야만 한다. 자신의 내면이 속삭이는 소리조차 의심을 해야 한다면 세상의 무엇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까마득히 먼 하늘을 바라보다가 보면 가끔은 윤곽 흐린 점 하나가 꼬물꼬물 움직이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사람이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비록 자신과는 관련이 없을 것임이 분명하다 해도 괜한 궁금증이 일어나는, 그런 존재이다. 궁금증은 시간의 진행과 함께 경험과 지식의 저장소를 기반으로 추론이라는 기능을 발휘하여 그 대상에게 가까이 다가서도록 만드는 정교한 장치이다.
언제인가부터는 그 점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 같다고, 이젠 알 것 같다고, 희미하긴 하지만 분명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상당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의 정체는 자그마한 개인용 비행기이다. 그것은 벌새의 날갯짓 같은 프로펠러의 회전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아주 오래된 하지만 날렵하게 잘 빠진, 구형의 비행기 한 대이다.
제대로 된 형체를 인지할 수 없을 만큼이나 까마득하게 멀다는 것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 때가 있다. 너무 먼 것에 대해서는 바라는 것과 실체의 것의 경계 또한 흐려져서 믿는 것이 곧 그것이기 마련이다.
그날과 그다음의 어떤 날에 내가 본 것이 옳다면, 분명 그렇다고 믿고 있지만, 그리고 비록 아주 짧은 조우의 시간이었을 뿐이지만, 눈썰미 좋은 내가 결코 잘못 보았을 리가 만무하기에, 지금도 확신하고 있는 것은, 그 비행기의 조정석에 앉아 있는 이의 얼굴이 아주 낯익은 한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너무 멀어서 비행기인지조차 알아보기 힘든 그 물체의 안을 들여다보았다는 나의 말을 믿으라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을 믿든 말든 그것은 순전히 각자의 몫이다. 어쨌든 이런 부류의 이야기에 있어서는, 가끔은 어리석은 결론에 도달할 때가 있긴 하지만, 나는 나와 나의 인지력을 충분히 믿는 편이다.
커다란 둥근 유리를 2개 끼워 만든 비행 안경을 머리에 두르고 사막의 가을빛을 닮은 연갈색의 모자를 머리에 커다랗게 뒤집어쓴 이는, 1944년 7월 31일이라는 어느 날인가부터, 흔히 그의 마지막 비행이라고 말하고 있는 행위로부터, 인간의 세상으로 내려오질 않고 있는 생텍쥐페리(Saint Exupery)라는 이름을 가졌던 프랑스 태생의 남자이다. 그 비행사가 그라는 것을 알게 되자 또 다른 궁금증이 일어난다.
“제약 없는 하늘을 영원의 시간 동안 비행하고 있는 생텍쥐페리도 그날 이카로스와 같은 꿈을 꾼 것은 아닐까.”
그가 아직도 하늘을 날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세상에서의 ‘그의 사라짐’ 또는 ‘증발’에 대해, 충동적 선택이라든가 불의의 사고라는 세속적 표현을 붙이려는 이들을 지독하게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것이 동요의 노랫말처럼, 작은 쪽배 같은 비행기를 타고 아직도 푸른 하늘 은하수를 날고 있는 그를 목격한 이가 충실히 지켜야 할 의무이다. 일단 그의 비행을 목격한 이라 해도, 그 암묵적인 의무를 지켜야만 언젠가 다시 그와 그의 비행기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떤 현상을 입이나 글에 담을 때면, 해야 할 것과 해도 되는 것, 할 만한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잘 가려야 하는 법이다. 그날부터 적어도 나에겐, 생텍쥐페리에 대한 통속적인 세상의 표현들은 바람 부는 길가에서 뒹구는 하찮은 쓰레기 뭉치에 불과하다고 여겨야만 하는 것이다.
“1944년 7월 31일 그날 생텍쥐페리는, 그의 하늘에 영원히 머물도록, 스스로가 결정한 것이다.”
나에게 있어 생텍쥐페리는 또 다른 이카로스이다. 누구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이카로스의 주검을 이카루스해라고 불리는 바다에서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증명할 수 없는 가설 내지는 전설이어야만 한다. 이카로스의 추락은 그러할 거라는 어설픈 추측이 만든 하나의 가설일 뿐이고, 반쯤은 신화가 되어버린 설익은 전설일 뿐인 것이다.
이카로스 또한 생텍쥐페리처럼 스스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들을 잃은 아비이자 유일한 목격자인 다이달로스의 신세 한탄 같은 증언은 무시해 버려도 된다. 사실 다이달로스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이라면, 그의 이야기에 대해 한번이라도 곰곰하게 되새겨 본이라면, 그가 얼마나 충동적이고 부주의하고 무책임한 남자였는지, 과연 한 가정을 꾸릴만한 제대로 된 책임감이 있는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부정적인 눈빛을 반짝이게 될 것이다.
실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래도 눈이 부시다. 영원한 비행을 꿈꾸는 두 남자, 이카로스와 생텍쥐페리는 지금도 하늘이라는 허공에 걸려 있는 태양을 지나 미지의 공간 어딘가를 훨훨 날아다니고 있다.
“마음의 눈을 크게 떠서 하늘을 올려다 보라. 이제 보이는가. 결코 추락하지 않을 두 사내의 멋진 비행을.”
By Dr. Franz KO(고일석, Professor(Donnguk University(for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