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다 보면, 때론 나 자신에 대해서 조차 방관자가 되어야 하는, 그래서 막막하고 아련하기까지 하는, 그런 때가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방관자란 ‘어떤 일에 직접적으로 나서서 관여하지 않고 곁에서 그냥 지켜보기만 하는 사람’이라는 사전적인 뜻의 인간 유형이 아니라, ‘능숙한 방관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능숙한 방관자란 무엇이고 어떻게 그것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글쓰기와 사색하기와 여행하기는 능숙한 방관자가 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다. 여행은 움츠려 들었던 자신의 감상을 증폭시키고 평소 외면하였거나 숨겨 두었던 자신의 내면을 몇 걸음 바로 앞에서 마주 볼 수 있게 하는 용기를 북돋우어 주는, 실제적인 수단이다.
여행지의 늦은 밤 또는 이른 새벽에, 좁은 탁자의 등불 아래를 지키며 사색의 바다를 항해하며 무언가를 긁적여 내는 사람이, 어두운 방안을 부유하고 있는 먼지 입자의 미세한 움직임에서조차 의미를 찾아내게 되는 ‘볼 수 있는 자’이자 ‘느낄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사물과 주변을 섬세하게 볼 줄 알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그 현상에 엉켜 있는 뜻을 풀어낼 수 있는, 마음과 가슴의 눈을 가지도록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 언젠가, 능숙한 방관자이자 진정으로 아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가끔은 삶이란 게 랭보와 블레이트의 시 몇 편을 책상 위에 잔뜩 흩어 놓고 마음 가고 눈길 가는 대로 한 편씩을 집어 올려 느긋하게 읽어 내리는, 늦어졌던 어제의 밤이거나 너무 이렀던 오늘의 새벽은 아닌 겐지, 궁금해지곤 한다.
허락된 것들과 허락되지 않은 것들,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모든 생각과 행위 같은, 지상의 모든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현상은, 삶의 포화 속을 헤집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자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은, 눈에 보이거나 볼 수 없는 어떤 것들에게 새겨져 있는 세상적인 언어의 생채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때때로 ‘의미를 가진 개체’란 ‘강해서 살아남았고 그래서 슬프지는’ 안쓰럽고 안타까운 어떤 것이기도 하다.
어수선한 책상 위를 대충이라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의 걸음을 앞으로 디뎌 본다. 손을 내려 순서 없이 쌓여 있던 텍스트 뭉치를 조심스레 집어 올리자 색 바랜 시간이 엉켜 붙은 마른 잎사귀 하나가 툭 바닥에 떨어져 내린다. 허리를 굽혀 보지만 차마 그것을 치울 수는 없겠다. 이러니 저것들을 지금껏 저리 그냥 두고, 마음 부디끼며 살아왔을 수밖에.
의미를 가진 개체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만물을 통 털어서 유일하면서도 가장 소중한 존재인 나 자신이 어느 날 만약 사라지게 된다면, 과연 이 세상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나의 부재는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기에 내가 바로 의미를 지닌 모든 개체의 중심인 것은 아닐까. 이것에 대해서는 훈련 잘 된 능숙한 방관자로서, 시간을 갖고 조금 더 고찰이 필요할 것 같다.
인간은 비록 물질계를 살아가는 있는 존재이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비이성적인 세상을 살아가고도 있는 형이상학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있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물리적인 공간을 두 발로 걸어가는 행위이기도 하고 또한 정신적인 공간을 발 디딤 없이 유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을 조금 더 확장해 본다면 ‘인간의 사라짐’은 단지 ‘물리적으로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초의 상태로,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것’이 된다.
태초의 상태란 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 물질적으로 부재하게 되는 것이 결국에는 정신적으로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물질적으로 본다면 무에서 온 것이 무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다른 어떤 언어적인 설명을 덧붙일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란 게, 없던 것이 어느 날 형체를 가지게 된 것이고 태초 우주의 상태란 게 케이아스(혼돈)에 케이아스가 엉켜 붙은 메가 케이아스였으니, 그 속에서 빚어진 인간의 내면 어딘가에는 케이아스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케이아스에 대해, 자신의 내면과 마찬가지로,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금지된 것들이 주는 즐거움에 대한 중독이나 설명할 수 없는 비논리적 행위와 현상의 원인이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를 케이아스 속에서 창조한 그분에게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by Dr. Franz KO(고일석, Professor(동국대학교(for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