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글쟁이들과는 다르게, 어떤 부류의 글쟁이들에게서는 형이상학적이라 할 수 있는, 그래서 다소 난해하기까지 한, 텍스트의 흐름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그들의 글이 헤집고 지나간 숲길을 쫓아다니다가 보면, 일상의 언어가 지천에 깔려 있는 세상에서, 드문드문하긴 하지만 아슬아슬한 감상과 깊이를 헤일 수 없는 사색이 피어낸 야생화의 군락에 파묻혀 버리곤 한다.
하지만 그런 글쟁이들의 글은 대중에게선 오해를 받기 십상이다. 자신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그래서 혼동스럽긴 하지만 또한 아름답기도 한 내면의 속삭임을 글로 옮겨 낸다거나, 어떠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것을 찾아가려는 비물질적인 행위가 그 글에 담겨 있는 경우에는, 그러한 오해가 더욱 심해진다고 할 수 있다.
오래전, 나의 목마름을 덜어주었던 작가들에게서도 그런 부분들이 찾아진다. 의도된 바는 전혀 아니겠지만, 읽는 이로 하여금 자전적 작품임이 분명하다고 판단하게 만드는 글이나 소고나 일기 같은 것들을 통해 그들의 내면을 엿볼 수 있게 하는, 한편으로는 그런 것들 때문에 다가서기 더욱 어렵게 만들기도 하는, 좁고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곳곳에 만들어 두었다.
랭보의 경우 그의 작품 <지옥에서의 한 철>에서 시라는 글의 형식을 빌어 빚어낸 글의 뭉치에서, 어떤 것은 운문으로 어떤 것은 산문 같은 운문의 형태로 자신의 내면과 사색을 무언가에 상징적으로 빗대어가며 잔뜩 스케치 해 던져두었다.
그런 유형의 작품들을 읽어 가다가 보면 운문이나 산문이라는 고정된 하나의 형식으로 그의 글을 규정짓는 것은, 그를 단지 ‘시인’이라고만 정의하는 것만큼이나 위험스러운 짓임을 알게 된다.
나에게 랭보의 작품은 그것을 뒤적이는 시간이나 공간에 따라, 또는 그날이 언제인지와 어느 계절인지에 따라, 그리고 그때의 감상이나 기분에 따라, ‘운문적인 산문’이기도 하고 ‘산문적인 운문’이기도 하다.
카프카의 경우에는 그러한 경향이 더욱 짙어지는데, 나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내가 그의 시간을 살아간 지난 때의 그를, 일기의 형태로 남겨져 있는 검은 텍스트를 뒤적거리며 뒤따르다가 보면, 마치 시간과 공간이 뒤틀려버린 듯해서 그의 내면에 가까워진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도 신비롭고도 묘한 느낌에 빠져들게 된다.
하지만 그런 그와 나를 한 걸음만 뒤에서 바라보게 되면, 그것 때문에 오히려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져버린 카프카를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종종 우려하게 되기도 한다.
주로 깊은 밤에 행해지게 되는 글쓰기의 경우에는 사위를 온통 에워싼 어둠의 깊이만큼이나 글쟁이의 내면을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이 왜 그런 것인지, 그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알진 못하고 있지만, 아마도 밤하늘에 혼자 걸려 있는 달과, 지상과 허공에 뿌려 놓은 검은 어둠이 모종의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는 있다.
또한 말로는 형언하기 어려운 알 수 없는 어떤 은밀한 작용이 달빛과 어둠으로부터 행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봄 직 할 것도 같다.
깊은 밤의 글쓰기는 자신의 심연으로 찾아가는 온순하지만 적극적인 기도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기도에서는 아픔과 외로움, 지나간 것에 대한 회한이 검은 어둠에 형체를 잃어버린 밤의 입자처럼, 기도자의 의도 따윈 개의치 않고, 묻어나는 것 같다.
주체하기 어려울 수 있는 그러한 밤의 현상은 오직 어둠과 달빛의 정령만이 부릴 수 있는 신비롭고 아슬한 마법에 기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밤과 달이 부리는 마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누군가가 그러한 글을 접한다면, 자칫 단순한 호기심거리나 두서없이 내뱉은 주절거림으로 비칠 수도 있고, 그런 연유로 결국에는 그런 사소한 글 나부랭이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는, 우려도 있을 수 있게 된다.
글쟁이라면 글을 쓰는 것에서 만이 아니라 글을 읽는 것에 있어서도 자신 만의 주관과 방법이 있기 마련이다. 글쟁이의 그것을 ‘글에 대한 애착’이라거나 ‘글을 향한 고집’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글쟁이가 되고 싶었던, 글쟁이로 살아가길 바랐었던 젊은 날의 나 또한 그러한 애착과 고집이 있었다. 덕분에 상당한 양의 글을 나름대로는 깊이 있게 읽었으니 그 싱싱했던 시절의 애착과 고집에게 이제라도 감사를 전해야 되겠다.
그 시절에는 ‘글을 읽는다’는 것이 ‘책을 읽는다’는 것과 같은 음을 가진 다른 말이었다는 것을 밝혀둔다. 대게의 텍스트는 책에 담겨야만 비로써 ‘글’이 될 수 있었던, 참 괜찮았던 시대를 살아왔기에 ‘글 좀 읽었다’는 것은 ‘책 꽤 많이 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참으로 행복한 시대가 그 시절이었기도 했다.
그렇다면 글을 좀 읽었다고 하려면, 책을 꽤 많이 읽었다고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는 이것에 대해 차근하게 정리를 하거나 곰곰하게 생각해보지는 않았지만, 그 시절은 이미 아득하게 멀어져 가버렸으니, 이제라도 이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기억에 남아 있는 행적들과 돌이켜 살펴볼 수 있는 기억들을 바탕으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을 읽는 첫 번째 단계는 ‘글 읽어주기’였다. 그냥 그냥, 손에 잡히고 눈길이 가는 대로,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글과 글을 읽고 또 읽으면서 새로운 글쟁이들과 그들의 글을 조우하길 즐겼였다.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서의 절대량’이었다. 이유란 건 없이 무조건하고 많은 글을 읽어야만 했다.
그러다가 마음 가는 글과 그 글을 쓴 글쟁이를 만나게 되면, 그가 남긴 다른 글들을 찾아다니며 숨을 쉬 듯 물을 마시 듯, 검은 활자들을 가슴과 영혼에 들이켰다. 그러다가 보면 그 글쟁이와 나는 다음 단계를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간 그와 그의 글들은 사색의 울타리 안으로 몰아넣어졌다. 그때부터 그와 그의 글들은 나와의 본격적인 동거생활이 시작되었다. 한 지붕 아래의 한 침대 위에서, 손만 뻗으면 닿게 되는 늘 가까이에서 뒹굴었으니, 언제든 살을 붙여 서로를 탐닉할 수 있었다.
그렇게 속속들이 서로를 알아가면서 여러 달을 지내다 보면, 어떨 때는 몇 해를 그렇게 지내다 보면, 묵힌 장이 익어가듯이 성숙해져 가는 애정을 느끼게 되었다.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고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어쨌든 그러한 질적인 면에서의 포만감은 ‘자기애에 빠진 자기만족’이라는 내적 엑스터시(ecstasy)를 발현시켰다.
글을 읽는 행위를 독서라고 하기에, 독서에 있어서, 양적인 성숙은 질적인 성숙을 위한 선재 조건이면서 또한 필요조건인 셈이다.
독서조차 이러할 진데 하물며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떠할까. 사람 또한 독서의 대상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서로를 읽기 힘들어진다. 그렇게 되면 결국에는 첫 단계를 넘지 못하게 된다.
특히 초기의 잦은 만남은 서로를 온전히 읽어낼 수 있게 하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원천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너무 긴 독서는 서로를 정신적으로 지치게 할 수 있다. 정신적으로 지친다는 것은 결국 그 또는 그녀가 떠나가게 될 거라는 예정된 신호이기도 하다.
그래서 만남의 초기일수록 상대를 알기 위한 시간을 충분하게 가지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비록 물리적으로는 길지 않지만 정신적으로는 더욱 넉넉해진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인간에 대한 독서에는 느낌이라는 인간의 본연의 감정 이외에도 심장과 가슴의 떨림이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글의 독서도 사람에 대한 독서도 경험과 훈련이 필요한 과정이다. 그렇다면 어떤 글쟁이와 그의 글과의 만남은 어떠할까. 더 오랜 시간의 인내와 읽기가 필요한 것이 분명할 텐데 짧은 시간, 몇 글만으로 그와 그의 그것을 안다고 자만하는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간에 결국 독서는 시간과 정신적 노력의 양과 질의 문제이다. 상대가 지치기 전에 그 사람을 충분히 읽어야만 한다. 작가와 그의 글에 대한 오만한 판단이 처음의 느낌을 지워내기 전에, 그와 그의 글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어야 한다.
글 읽기도 사람의 관계도, 독서에는 인내의 읽기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뉴욕의 하늘 아래에서
by Dr. Franz KO(Professor, Dongguk University(for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