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시간에 대한 고찰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시간에 대한 고찰



1.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라고 여겨지곤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공평함이란 크기와 질량, 부피와 같이 수치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단위에서의 그 절대 값이 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색하기를 즐겼던 고대의 그리스인들은 두 가지의 시간을 찾아내었던 것 같다. 이 중 하나가 크로노스(cronos)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kairos)이다.


크로노스는 일정하게 정해진 시간의 개념으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을 말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의 ‘정해진 크기와 단위를 가진 시간’이 이것과 가까워 보인다.


이에 반해 카이로스의 개념은 다소 형이상학적인 이해가 요구되는 시간의 개념이다. 카이로스는 ‘어떤 의미’를 가진 시간을 말한다. ‘시간이 의미를 가졌다’는 것은 카이로스를 시간의 주체로 보는 시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을 사용하는 인간을 중심으로 본다면 카이로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간’이라 할 수 있게 되어 좀 더 능동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크로노스는 단 한순간, 그것이 비록 단 일 초 만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것 이외에 타인의 것을 빼앗거나, 자신의 것을 빼앗길 수 없는 객관적인 시간의 개념이다. 크로노스로 본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일 년을 365일, 하루는 24시간, 한 시간은 60분, 일 분은 60초와 같이 수치를 통해 정량화가 가능하다.



2.

시간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만 ‘시간이란 대체 무엇일까.’ ‘시간을 만든 것은 누구일까.’ ‘시간은 태초부터 있어온 것일까.’와 같이 시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는 우선 논외로 붙여야 할 것 같다. 만약 본질을 따지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지면이 부족하게 될 것이다.


우선 ‘시간을 사용한다’는 관점에서의 시간에게로 눈길을 가져가 보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완전하게 주어진 자유지만 스스로 그 결과를 책임져야’하는 권한과 의무를 지닌 행위이다.

시간은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에게 어떠한 제약을 가하려 하지 않기에, 그 자유로움으로 인해 크로노스의 소중함은 쉽게 잊혀 지기 일쑤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카이로스가 필요했던 것 같아 보인다. 카이로스의 개념에는 책임을 잊어버린 시간의 낭비에 대한 경고가 담겨 있다.

카이로스란 의미를 가진 시간이다. 어제 내가 보낸 24시간을 돌이켜 보자. 그 시간 중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24시간 전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1시간 또는 2시간 정도인 것일까. 자신 있게 ‘분명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은 과연 얼마인 것일까.


만약 그것이 1시간이나 그 이하뿐이라면 어제 나에게 주어진 크로노스는 24시간이었지만, 카이로스는 1시간이 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나머지 23시간이란 시간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아침 햇빛에 물안개가 사라지듯 그저 증발해버린 것일까.


이렇듯 크로노스는 객관적인 단위를 통해 일반화된 시간의 개념으로 볼 수 있고 카이로스는 주관적인 관점으로 바라본 특수화한 시간의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크로노스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원래부터 있어온 타의적 개념의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그 시간을 사용하는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 자의적 개념의 시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The_Persistence_of_Memory(Salvador Dali).jpg The Persistence of Memory, Salvador Dali, 24 cm × 33 cm, 1931,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City


3.

시간 또한 개체이고 크로노스는 정량적인 개체로, 카이로스를 정성적인 개체로 여기게 된다면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해석이 끼어들만한 틈을 여기저기에서 만들어 볼 수 있게 된다.

인간의 능력은, 비록 그것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없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을 창조해 내지는 못하는 법이다. 원래부터 있어온 것에 대한 무지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나려는 정량적이고 객관적인 행위가 과학이고 그것에 의미를 담아 해석하려는 정성적이고 주관적인 행위가 철학이라 할 수 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에 대한 생각의 걸음을 조금 더 앞으로 끌고 나가본다. 크로노스는 지극히 정량적이고 자연계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태초부터 주어진 시간이다.

그래서 자연계에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다른 모든 것들처럼 크로노스 또한 끊어지지 않는 연속성을 띄고 있으며 그것을 동일한 크기와 분량으로 나누어 연결할 수 있게 된다.


어느 날엔가,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의 생각하고 생각하던 ‘사고의 유희’가 어딘가 꼭꼭 숨겨져 있던 카이로스를 인간 세계로 끄집어내었고 그때부터 시간은 정성적 성질을 지닌 개체가 된 것이다.


비록 그것이 카이로스라 하더라도 시간 또한 자연계에 존재하는 하나의 개체가 된 이상 어떤 특정 구간에서는 반드시 연속성을 갖기 마련이었다. 이제 물질계로 끌려 내려온 크로노스에게 속성을 부여해가는 행위는, 예를 들어 크로노스를 글과 논리에 담아내는 행위와 같은, 생각하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간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4.

그렇다면 정성적이고 가변적인 카이로스를 정량화할 순 없을까. 수학적으로 본다면 어느 특정 시점, 영에 가까운 지극히 짧은 시점에 대한 미분을 통해 카이로스를 크로노스화 할 수 있어 보인다.

그것은 영에 가까운 순간에서 미분된 개체는 비록 그것이 카이로스라고 하더라도 정량화된 특정 값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일반화된 것이든 특수화한 것이든, 이 두 가지의 시간 모두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고 있다. 자신의 삶에 조금이라도 더 풍요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면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바라보는 균형 있는 시야를 늘려가야만 한다.


카이로스 또한 크로노스 속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가 해야 할 일은 객관의 크로노스를 아주 조금씩이나마 주관의 카이로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의미를 가진 삶이란 객관의 크로노스에서 주관의 카이로스를 찾아 쌓아 가는 것이다.

언젠가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았을 때, 흘러간 크로노스 속 어딘가에 쌓아둔 카이로스를 찾아 만지작거리며 채색하는 것이, 희끗해진 머리에 문득 불어오는 바람을 그리 차갑게 만은 느껴지지 않게 만들 것이다.


문득 궁금하다. 사뮈엘 베케트의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인 블라디미르(Vladimir)가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시간과,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돌을 굴려 산을 올라야만 하는 시시포스(Sisypos, Sisyphus)의 시간 속에는 얼마만큼의 크로노스가 있는 것일까.


비록 물질계 속을 살아가야만 하지만 ‘생각하고 생각하는’ 본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인간의 크로노스는 얼마만큼의 카이로스로 환산될 수 있는 것일까.


태초 신에게서 부여받은 인간의 시간 속에는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외에 다른 시간은 없었을까. 혹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놓친 게 있다면, 지금이라도 그것을 찾아 나서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by Dr. Franz KO(고일석, Professor, Dongguk University(for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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