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신성을 기다리며
인간이 신성에 의해 세상에 출현하게 된 것이라면, 또한 그 행위를 ‘창조’라고 부른다면, 인간은 신성이 창조한 가장 위대한 피조물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인간은 태생적으로 신성에 의한 심판의 대상이 아닐 수밖에 없다. 그것은 또한 인간에게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신의 형상을 닮도록 창조된 인간은 결코 원죄 속에서 태어나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갓 태어난 아기의 얼굴에서는 죄의 그늘이 찾아지지 않는 것이다.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열성 따위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인간은 열등한 존재'라는 표현은 오직 신과 인간을 비교할 때나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완전한 우성으로 창조된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후천적으로 짓는 죄, 오직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어 저지르는 죄로 인해서만 심판대에 오르게 된다. 인간은, 심판대에 올라서서도 질문을 내뱉는 존재이다. ‘질문하기’는 인간이 우성으로 창조되었음을 증명하는 형이상학적 행위이다.
―――――― α ――――――
과연 어떤 것을 ‘죄’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죄에 대한 정의는 무엇이란 말인가. 사전에서 말하고 있는 ‘양심이나 도리에 벗어난 행위’가 죄라면 어느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또한 ‘잘못이나 허물로 인하여 벌을 받을 만한 일’이 죄라면 인간은 모두 형벌에 처해져야만 하는 죄인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계명을 거역하고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는 인간의 행위’가 죄라면, 그 범위의 포괄성으로 인해, 성인이나 성직자조차 죄인의 산분을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인간 모두를 죄인으로 만들고 있는 일반적인 죄의 정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혹시 언젠가 이것 또한 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때는 죄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아니한 것, 그때는 죄라고 여기지 않았지만 지금은 죄에 해당하는 것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이와 같이 죄라고 칭해지는 것의 범주가 시대와 환경에 따라 가변적인데 법률문서에 박혀 있는 사회적인 죄나 경전에 새겨져 있는 종교적인 죄를 ‘고정불변 하는 절대적인 죄’라고 말할 수 있을까.
대체 죄의 공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신성적 관점에서의 죄와 법률상의 죄는, 세세한 차이점들이야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무수하겠지만, 어떤 근본적인 차이점을 갖고 있단 말인가.
•공리(公理, axiom): 일반 사람과 사회에서 두루 통하는 진리나 도리. 철학, 수학, 논리학에서 증명이 없이 자명한 진리로 인정되며, 다른 명제를 증명하는 데 전제가 되는 원리.
법률상의 죄는, 비교적 문서화가 잘 되어 있어 ‘죄지음’을 어느 정도 피해 가는 것이 가능하지만, 신성적인 죄는, 비록 경전에서 언급하고는 있지만 해석상의 문제가 그것에게 늘 끼어들고 있어 ‘죄지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이라면 신성적인 죄는, 어느 정도는 지으며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신성적인 죄에 대한 심판은, 죄가 있음과 없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이나 죄를 지었느냐는 ‘죄의 무겁고 가벼운 정도’와, 어느 정도까지의 죄가 ‘심판의 대상이 되는 죄’ 인가, 하는 ‘죄지음의 임계치’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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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진화에 있어서, 지적 무지를 깨쳐온 이들이 선지자이고 예지자이면서 신전을 지켜온 신성의 매개자이다. 의문은 그들의 지적인 성숙 수준에 대해서도 가져볼 수 있다. 인간의 지적 수준이 지금과는 큰 차이가 있었던 시대에, 그들은 과연 신성을 제대로 해석하고 그것을 일반 인간들에게 명료하게 전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지적인 존재였을까.
그 시대에도 신의 언어는 인간의 것과는 분명 달랐을 것이다. 기록된 바와 같이 인간이 신을 닮은 부분은 오로지 겉모습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신성의 대필자였던 그들은, 신성을 해석함에 있어 어떤 오류를 범했을 확률이 아주 높다. 대필에는 필시 옮기는 이의 지적 수준과 사고, 경험이 큰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신성을 느끼고 신성을 전달해 온 그들의 지적 수준은, 당시 얼마나 성숙해 있었던 것일까. 뜻깊고 어느 것 하나 허술함 없는 신성의 완전한 소리를 그들은 얼마나 이해하였던 것일까.
지능이 높아질수록 지적성숙의 수준이 높아지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또한 지적성숙의 수준이 높은 피조물은 자기애가 강하고 이기적이며 교만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신학적이거나 철학적인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개와 원숭이를 생각해 보면, 지능이 자기애와 이기심, 교만에 미치는 상관관계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분명하게 설명키는 어렵다. 그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받아들이면서 “혹시 신의 뜻은 아닐까.”라고 여겨야 한다. 하지만 성숙된 지적 수준은 신성을 더욱 강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그렇게 해서 자기애와 이기심, 교만조차도 신성의 존재를 부인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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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은 물리적으로는 확인할 수 없기에 현실세상에서는 모호함과 같이 이성적이지 못한 것들의 간섭을 받게 된다. 이것은 신성이란 게 인간의 이성을 넘어선 초인간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신성을 깨치고 해석하기엔 우리 인간의 지적 수준이 충분하지 못한 것 같다. 어쩌면 여기까지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일 수 있으며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해 준 것만으로도 신성에게 감사해야 할 수 있다.
신성은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알파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간이 오메가를 찾겠다는 것은, 채 성숙하지 않은 지적 수준 때문일 수 있다.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또 다른 시작점에 서야만 하는 것이 신성에 대한 질문이다. 아마도 이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치면서 자신의 두 발로 걸어 신전에 도달하라는 신성의 뜻일 것이다. 인간은 생각하기에 능한 존재이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신성은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계의 한 부분일 뿐이지만 신성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희미하게나마 신성을 느낄 수 있고 언젠가는 그것을 깨칠 가능성을 가진, 아주 특별한 존재이다. 인간의 정신세계란 게 신성의 영역에 닿아 있는 것이니, 그 안에서 신성을 찾아 나설 수 있고 또한 하나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 개개인은 하나의 소우주이자 세상의 중심이다. 따라서 정신적으로 자신을 꼿꼿하게 세우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바로 세상의 중심이란 것을 자신에게 선포하는 인간다운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정신세계에서의 능력은 무한하지만 현실세계에서의 능력은 극히 제한적인 것이 인간이란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은 부족함을 일상으로 달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부족함은 인간을 혼돈의 숲을 헤매도록 만들기에 길을 잃는 것 또한 일상의 한 모습일 뿐이다.
앞 뒤 말이 달라지기도 하고, 어제의 기억조차 희미해지고, 바로 앞의 것조차 잊어버리기도 하고, 자신의 주관을 객관이라 우기고, 잘못을 저지르고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덮어버리려고 하는 것이 인간 일상의 모습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인간의 태생적 허술함을 방어하기 위한 자기 보호본능이 발현된 것이기에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는 말아야 한다.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지적유희 속에서 신성을 가리고 있는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신성 그 자체를, 또는 자기 안의 신성을 깨치게 해 줄 그 어떤 현상을 오늘도 기다리며 길을 걸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길에서 분명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를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래서 길 걷기를 멈출 수 없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