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성에 의한 것이건 문자에 의한 것이건, 그것이 신성(神聖)과 관련된 것이라면, 개인 혹은 집단에 따라 신경을 곤두세워가며 예민하게 반응하곤 한다. 물론 전적으로 그런 이유에서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신성은,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다루거나 언급하기 몹시 껄끄러운 주제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지금까지 무수한 철학자들과 문학가들, 예술가들이 이것에 대해 피력해 왔고 지금에 와서도 또한 그러하고 있다. 그것은 신성에게서는,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 생각하기에 능한 이를 끌어당기는 무엇인가가 반짝반짝 그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를 ‘사색하기에 능한 이’라고 불러도 좋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무엇인가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놓으려는 행위는 지극히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다운 일이며 그것은 신성이란 주제에 있어서도 다를 수 없다. 또한 이러한 행위가 빚어낸 산물이, 좀 더 신성에 가까워지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에게 높은 울타리를 둘러쳐야 할 아무런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된다.
이쯤에서 한 가지 밝히고 싶은 점은, 이렇게 장황한 문장을 늘어놓으며 서두를 장식하는 글의 경우 대게는, 신성을 느끼고는 있지만 그 느낌이란 게 미약하기만 해서, 신성의 실체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에둘러 표현하려는, 쓰는 이의 의도가 그 안에 감추어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신성을 탐구함에 있어서 부딪히게 되는 첫 번째 질문은 “신성이란 게 존재하느냐.”라는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신성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신성을 믿는 것이냐, 아니면 사람의 믿음이 신성을 존재시키고 있는 것이냐 하는 ‘믿음의 본질’에 관한 것이 된다. 그래서 이 질문은 믿음이란 것의 실체에 대한 것이면서 또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지적유희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신에 비해 우리라는 인간은 어떠한가. 신이 가진 전지전능한 능력과 비교하자면 ‘무한히 0이란 값에 가까운’, 터무니없을 만큼이나 미약한 능력을 지닌, 실로 나약한 존재가 인간이다. 어떤 이유에선지 신은 인간을, 형상만은 자신을 닮게 빚으면서도 능력에서는 자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할만큼이나, 미약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신은, 인간이 지금보다 더 큰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 것 같다.
―――――― α ――――――
인간은 신을 찾고 탐구하면서 때가 되면 성전에서 기도하고, 고개 숙이고, 무릎 꿇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간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신을 직접 만나볼 수 없는 존재이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에 우리의 선조가 지었다는 최초의 죄가 신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원죄는 우리가 저지른 죄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연좌제와 결부된 것이며, 그것으로 인해 이데아를 기웃거리는 것조차 후손인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우리에게 벌어지게 된다.
•연좌제(緣坐制): 범죄자와 일정한 친족 관계가 있는 자에게 연대적으로 그 범죄의 형사 책임을 지우는 제도.
인간의 단기 기억 속에는 죄를 지었다는 사실과, 추방을 당했다는 사실이 남겨져 있지는 않지만, 어쩌면 스스로가 지워버렸을 수는 있지만, 이데아에 대한 향수는 바다 너머 하늘 저편에 낮게 걸려 있는 이른 새벽의 한 점 불빛과도 같이 장기 기억 속에서 깜빡깜빡 그 반짝임을 이어 오고 있다.
인간은 탄생과 성장, 늙음과 소멸이라는 유한한 물질계의 현상 속을 살아가면서도 무한한 정신계를 맘껏 누빌 수 있는, 진정으로 신비스러운 존재이다. 또한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연약하지만 정신적으로는 이토록 완벽한 신묘한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것을 기꺼이 찾아 나서려는 호기심 많은 존재이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앞을 향해 걸음을 디디는 도전적인 존재이다.
이렇듯 연약하면서도 가장 완벽한 존재인 인간이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눈으로는 그 실체를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지고 있는 저 초인적인 존재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 α ――――――
인간에 대한 탐구는 결국 신성이라는 크나큰 바다에 도달하여 길고 긴 항해의 닻을 올리게 된다. 여기에 도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오랜 시간을 소요하였지만 정작은 이제부터가 시작일 뿐이다. 이 항해가 어느 선착장에 닻을 내려 쉬어가게 될지는, 그런 일이 있게 될지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다만 해와 별과 달과, 구름과 바람과 파도만이, 신성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이 바다를 항해할 수 있도록 이끄는 나침판이자 멈추지 않는 동력이다.
아무리 돌아서 오게 되더라도 신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물질계와 정신계, 어디로 보더라도 결국에는 부인하기 어렵다. 아마도 그것 때문일 수 있다. 사유하기의 끝자락에 이르러 만나게 되는 구체(具體)가 철학이란 것과, 대부분의 학문에서 수여하고 있는 최종적인 학위가 ‘철학박사’를 뜻하는 Ph.D.(Doctor of Philosophy)라는 것, 그리고 신학은 철학의 추상(抽象, abstraction)이란 것은. 그래서 생각하기에 능한 이의 길 걷기는, 그의 배경이 어찌 되었건 간에, 결국에는 철학과 신학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철학이 인간과 세상에 대한 탐구이며, 그 탐구의 궁극에 도달하게 되면 미지의 것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곳까지 도달한 생각하기에 능한 인간은, 궤변 같아 보이기도 하고 말장난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지적 논리를 앞세워 자신만의 서술을 쏟아내곤 한다.
논리가 부족한 사람에게서는 자신의 생각을 어렵게 꼬아 표현하려는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철학자들의 그것에서는 분명한 지적 논리가 찾아지기는 하지만 이성적인 인간조차 알아차리기 힘든 논리가 그 안에 내포되어 있어, 그것이 지적 논리인지 철학적 논리인지, 아니면 논리로 포장한 괴변인지를 종잡지 못할 때가 종종 생겨나게 된다.
어떻게든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이곳 또한 쉬어갈 만한 이데아는 아니다. 아직은 걸음을 더 디뎌야 한다. 애초 이 길에 나선 것은 이데아를 찾기 위해서이다. 사색하기와 사유하기를 멈출 수 없는 것은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에게 내려졌다는 태초의 형벌 때문이다. 어떤 형벌은 죄를 저지른 이에게만이 아니라 그 후손들에게까지 가해진다고 한다.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억울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서 그 형벌을 받아들일 수만도 없다. 그러니 한 걸음이라도 더 걸어야 한다.
"인간에게 원죄의 굴레를 씌운 것은 신이라니, 인간을 연좌제의 틀로 옭아맨 것이 신이라니, 신성은 참으로 불가해한 무엇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