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노랑이 좋아졌다.
아니, 원래부터 노랑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기에 “좋아졌다.”라기보다는 “더 좋아하게 되었다.”라는 것이 좀 더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인지할 수 있는 다양한 색상들 중에서 유독 노랑에 더 강한 애착을 갖게 된 것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이 그것에게 관여한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간에 분명하게 지금은 “노랑이 좋다.”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노란색과 노랑이라는 두 개의 색은 비록 그 뿌리는 같겠지만 다른 색이고 서로 달라야만 한다.
‘노랑’의 사전적 의미는 ‘노란 빛깔이나 물감’이고, ‘노란색’은 ‘병아리나 개나리꽃의 빛깔과 같이 매우 밝고 선명한 색’이다.
노랑은 색뿐만이 아니라 빛까지도 포함하여 ‘노란 느낌을 주는 색상 전체’에 대한 넓은 의미에서의 ‘노란 것’에 대한 표현이며, 노란색은 좀 더 밝고 화사한 느낌을 주는 노란 것에 대한 표현인 것이다.
즉 노란색은 노랑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1888년 작 <밀건초더미>, <WheatStacks>
고흐의 작품은 노랑이라는 색상이 가진 다양성과 포괄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행여 고흐의 작품에 대해 '노란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자신이 노랑과 노란색을 제대로 구분할 줄 모른다는 것을 스스로 자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조금만 신경을 두고 들여다보면 노랑의 포괄성에서 아날로그적인 것의 포괄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입 밖으로 노란색이라는 단어를 선명하게 뱉어 내는 것보다는 노랑이라는 단어를 흘리듯 밀어내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그것 때문일 수 있다.
나의 아날로그적인 감성은 색에 있어서만큼은 종종 예민해지곤 한다.
아날로그는 장소와 때에 따라, 또는 순간순간의 느낌에 따라, 다르지 않은 것들을 서로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변덕스러움의 원천이다.
아날로그적인 것 모두가 변덕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변덕스러운 것에서 아날로그적인 것을 찾아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아마도 그것은 인간은 태초부터, 아날로그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아날로그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인간은 그 자체로서 아날로그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아날로그적인 것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아날로그적인 것이, 노랑이 그런 것처럼 포용력 또한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아날로그적인 인간으로 살아감’과 '노랑에 유독 끌리고 있음'을 인정해 버리는 것이 자신의 변덕스러움을 변명하는, 그래서 자신의 변덕스러움이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저지르게 되는 '인간의 포괄적인 행위'의 하나라고 치부할 수 있는, 이를 통해 결국에는 자기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