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는, 화가로 살아간 10여 년 동안 '오직 반 고흐였기에 가능했을', 그리고 '오직 반 고흐만이 이룩할 수 있었을' 그만의 독창적인 회화기법을 창조해 내었다. 서양미술사에서 그가 새겨 놓은 족적들에 비한다면 10년이란 시간을 결코 길다고는 할 수 없다.
사실 반 고흐는 자신의 회화기법에 대해 별도의 설명을 남기지 않았기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규명하겠다는 것은, 별똥별의 파편을 찾겠다는 것과 같이 명확한 실체를 발견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Self-Portrait>, Vincent Willem van Gogh, 1853. 3. 30 - 1890. 7. 29(37세)
어쩌면 반 고흐의 예술을 이끈 것은 오직 ‘그림에 대해 이글거리는 열정’이었기에 그 자신도 그것의 실체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할지 못할 수 있다. 그러니 연구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남겨져 있는 반 고흐의 작품들과 직간접적인 자료들을 세세하게 들여다보면서 그것들을 분석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그것이 어떤 것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하나씩 짚어가는 것이며, 그것이 곧 반 고흐 미술의 실체에 다가서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반 고흐의 회화세계는 찬란하게 독창적이다. 그림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반 고흐만의 정체성(identities)을 알아차릴 수 있다. 반 고흐의 작품에서는 '반 고흐다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의 실체를 좇는 것은, 별빛 없는 깊은 밤에 낮은 관목들이 우거져 있는 들길을 더듬어 걸어가는 것과 같은 일일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반 고흐 예술에서의 실체(hypostasis)란, 늘 변하지 아니하고 일정하게 지속하면서 반 고흐 회화작품의 근원을 이루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개념적으로 '구체화'를 실현한 '무엇'을 일컫는 것이다. 따라서 반 고흐 예술의 실체를 좇는 일은, 반 고흐와 관련되어 세상에 던져져 있는 무수한 현상들을 포함하여 개념적인 것들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반 고흐 예술의 주된 뿌리’를 찾으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반 고흐를 제대로 알고자 한다는 것은, 일상에서의 삶뿐만이 아니라 화가로서의 삶과 그의 정신세계까지, 그의 모든 것을 쫓아다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또한 그것은 어떻게든 풀어야만 할 것 같은 뒤엉킨 실타래를 손에 잡는 것과 같은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반 고흐의 예술은 무엇인가가 만져질 것만 같은 아스라한 향기를 풍겨내고 있어, 행여 한 발이라도 디디게 되면 그 곁을 떠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반 고흐의 예술을, 기법을 중심으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반 고흐 회화의 특징 중에 하나는 눈에 띄는 생생한 색상(striking colours, vivid colours)을 사용하여 풍경이나 정물, 인물과 같은 사물들을 도드라지게 표현함으로써, 캔버스 안의 사물들이 캔버스 표면에서 튕겨져 오르고 있는 것 같은 절제된 긴장감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독특한 기법을 통해 반 고흐의 예술은, 그것이 존재했던 시공간의 일정 부분과 현재 시공간의 일정 부분이 중첩을 이루면서 새로운 ‘예술적 시공간’을 창조해 내고, 작품 속의 그것들이 시공간을 이동하여 새로운 시공간에서 재배치를 이루게 되는, 반 고흐만의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의 소우주'라는 표현은, 인간은 그 소우주의 주인이면서 또한 그 소우주를 창조한 창조주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반 고흐는, 그만의 예술적 시공간을 창조함으로써 스스로가 창조주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래서 반 고흐는 인간이라는 소우주의 창조주이면서 또한 그만의 예술적 시공간의 창조주인 것이다.
‘강렬한 붓놀림’(emphatic brushwork)은 반 고흐의 작품을 더욱 독창적이게 만들면서 또한 그의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반 고흐 예술의 한 부분이다. 전시실에 걸려 있는 그의 작품을 한 걸음 앞에 서서 감상하고 있자면 반 고흐의 강렬한 붓질을 바로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신비로운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는 바람이며 나무며, 카페며 골목이며, 들판이며 밀밭이며, 신발이며 사람과 같은 사물 하나하나가 손 끝에 걸려들 것만 같은 미세하지만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구불구불하기에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윤곽을 세우고 있는 형태(contoured forms)의 사물들은 반 고흐의 작품에 신비로움을 더해 넣고 있다. 뭉개어진 듯한 반듯하지 않은 윤곽이 선명한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은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를 통해 반 고흐는, 예술이란 수학이나 논리학, 물리학과 같이 ‘물질적인 존재로서 사물을 바라보고 그것을 이성적으로 표현하려는 세상적인 행위’가 아니라 ‘초자연적이거나 초현실적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그것을 감성적으로 표현하려는 형이상학적인 행위’란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반 고흐의 작품에서 이질적인 신비로움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아이러니가 원인일 수 있다.
반 고흐의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꿈틀거리는 붓의 족적이 뿜어내고 있는 격렬한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꿈틀거리던 색은 어느 따뜻한 날 들판의 아지랑이처럼 점차 아른거리다가 감상하는 이의 머리 위로 높이 올라 태양처럼 이글거리게 된다.
어쩌면 반 고흐는, 사물의 뿌리가 태양에 있다고 보았을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반 고흐는,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1.7 - 1960.1.4)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처럼 ‘태양 때문에’라는 문장을 주문처럼 중얼거렸을 것이다. 반 고흐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그는 그 주문이 가진 강력한 주술에 걸려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알베르 카뮈가 반 고흐의 작품에서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사물'로부터 모티브를 한 가닥을 받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가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기 때문에 ‘괴팍한 인물’로 비치기도 하는 것처럼, 반 고흐 또한 ‘혼동스럽고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인간이란 부조리한 상황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그 부조리를 스스로 안고 살아가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이다. 반 고흐 또한 부조리라는 덫(trap)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처럼, 반 고흐는 자신을 가둔 부조리한 상황의 원인이 ‘태양’에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의 그림에서 마주하게 되는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색상이며 사물의 형태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끓어오르는 반 고흐 예술의 외적 표출이면서 또한 현실이라는 부조리한 덫으로부터의 ‘마지막 비상구’(Last Exit)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반 고흐 예술의 애호가들은 죽은 반 고흐가 남긴 작품들을 들여다보면서 살아 있는 반 고흐의 낡은 발자국 소리와 멈출 듯 이어지는 호흡 소리를 듣는 것만 같은, 발칙한 환청을 겪게 되는 것이다. 반 고흐를 가두었던 부조리한 상황은 그를 '태양의 화가'로 만든 영원한 에너지원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