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인상주의라는 용어는 이십 세기가 시작된 1906년에 와서 영국의 화가이자 미술 평론가인 로저 프라이(Roger Fry, 1866 – 1934))가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1910년에도 로저 프라이는 런던의 그래프톤 갤러리(Grafton Galleries)에서 자신이 주최한 전시회의 명칭을 <Manet and the Post-Impressionists>(한글로는 <마네와 포스트인상주의자들>)이라고 명명함으로써 다시 한번 인상주의에 ‘포스트’란 단어를 결부시켰다. 이 전시회의 명칭을 통해 '포스트인상주의'라는 용어가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1910년 10월 15일, 프라이의 <마네와 포스트인상주의자들> 전시회가 개최되기 3주 전에, 영국의 미술 평론가이자 큐레이터였던 프랑크 루터(Frank Rutter)가 <아트뉴스>(<Art News>)지에 게재한 [파리의 가을 살롱전](Salon d'Automne)에 대한 리뷰에서, 프랑스의 야수파(야수파(野獸派) 또는 포비즘(fauvism)) 화가인 오돈 프리즈(Othon Friesz, 1879 – 1949)를 ‘포스트인상주의의 리더’(a Leader of Post-Impressionism)라고 칭함으로써 '포스트'라는 용어가 공식적인 인쇄물에 실리게 되었다.
후기인상주의를 1886년에서부터 1905년까지로 보고 있기 때문에(후기인상주의 연구의 대가인 존 리워드는 후기 인상주의의 기간을 1886년에서부터 1902년으로 보고 있다.) 이때는 이미 야수파와 같은 다른 미술사조가 유행하고 있을 때였다. 포비즘(fauvism)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야수파는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 예술에서 짧은 기간 동안 나타났던 미술에서의 사조이다. 20세기의 미술은 반자연주의를 기조로 하는 혁신적인 사조(유파(流派))들이 혼란스러우리만큼 발생하면서 급격하게 변화하였지만 그것들의 발단이 된 것은 야수파이다.
로저 프라이의 <자화상>, 1928
<Self-portrait> of Roger Fry(1866 - 1934)
앙리 마티스(Henri Émile Benoît Matisse, 1869 - 1954)를 기수로 한 야수파 화가들은 강렬한 색과 표현을 추구하였다. 앙리 마티스를 리더로 한 이들 화가 그룹은 '거의 1870년대 태생'이라는 같은 세대의 연대감과 당시 화단에서 유행하고 있던 기성 회화에 대한 반동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그들만의 회화 이론 바탕으로 기성 회화에 일격을 가하겠다는 패기와 야심으로 뭉쳤다. 그들은 시각의 진실성만을 추구한 나머지 창조의 주체성과 내면적인 감동을 잃어버린 인상주의(印象主義, 고전인상주의)의 문제점을 타파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기존 인상주의에 중요한 변화를 가한 반 고흐와 폴 고갱 같은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의 기법과 표현을 모범 삼아 그들 나름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표현주의의 한 형태라고도 볼 수 있는 야수파의 기법상의 특징은 강한 붓질, 과감한 원색의 사용, 대상에 대한 고도의 추상화와 간략화이다. 야수파 화가들은 눈에 보이는 색채 그대로가 아니라 마음이 느끼는 색채를 밝고 거침없이 표현하였다. 이런 특징들에서는 후기인상주의적인 특징들을 볼 수 있다. 후기인상주의와 가장 차이점은 야수파 화가들이 추구한 '고도의 추상화와 간략화'이다.
'추상화'(抽象化)를 나타내는 영어단어는 Abstraction이며 그 뜻은 '주어진 문제나 시스템을 중요하고 관계있는 부분만 분리해 내어 간결하고 이해하기 만드는 작업'이다. 이와 같이 추상화의 개념에는 '간략화'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즉 회화예술에 있어 '어떤 것을 추상화'한다는 것은, 화가가 어떤 현상 또는 사물을 바라보는 것에서, 화가의 눈과 가슴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핵심적인 것들을 찾아내어, 그것들을 전체에서 분리하고 간략화하여 캔버스에 담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후기인상주의 또한 화가가 느끼는 방식을 표현하기 위해 사물에 변형을 가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추상화'를 추구한 화파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진정한 추상화의 단계'에 진입한 미술사조는 야수파라고 할 수 있다.
앙리 마티스의 <La Danse> (first version),
1909, MoMA(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City
비록 야수파의 흐름이 1900년 경에서부터 1910년 이후까지, 약 10년 동안 지속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1905년에서부터 1907년까지, 약 3년 동안에 걸쳐 세 차례의 전시회를 갖는 것에 그쳤으며 그 결속력 또한 강하지 않았기에 ‘잠시 나타난 유파’라는 문장을 사용하는 문헌들이 있다.
로저 프라이가 현재에는 ‘야수파화가’로 보고 있는 오썬 프리즈를 ‘포스트인상주의의 리더’라고 소개한 것을 통해, 20세기 초반까지는 [후기인상주의]라든가 [야수파]와 같은 용어가 하나의 미술사조로 완전하게 자리 잡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후기인상주의를 논함에 있어 야수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어쨌든 영국인 로저 프라이가 [포스트인상주의]라는 용어를 하나의 미술사조로써 자리 잡게 한 장본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α ――――――
로저 프라이는 <마네와 포스트인상주의자들> 전시회에 참가했던 화가들이 기존 인상파 화가들보다는 젊다는 점과, 그들의 작품에서 인상주의적이긴 하지만, 화풍에서는 뚜렷한 차이점이 있음에 주목하였다. 그들 화가들은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형성하고 있었다. 로저 프라이는 전시회의 개최자로서 그들 신진화가들을 통칭할만한 명칭에 대해 고민하였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프라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편의를 위해서 전시회에 참가한 예술가들을 한꺼번에 묶어서 부를 수 있는 이름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 모호하면서도 불확정적인 이름으로서 포스트인상주의(Post-Impressionism)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포스트라는 단어는 인상주의 운동에 대한 시기적인 위치를 상대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여기에서 ‘모호하면서도 불확정적인’이라는 문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전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에서는 ‘인상주의’적인 공통점을 찾아보기가 어렵지 않지만, 그와는 달리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들에서는 서로 간의 공통점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로저 플라이 또한 이점에서 고민하였던 것 같다.
명칭에 대한 그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로저 프라이는 자신이 개최한 <마네와 포스트인상주의자들> 전시회에 참가했던 ‘신진화가들’의 작품과 기성의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의 차별성이, 단지 시기적인 요인에서 온 것이라고 설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상주의가 ‘전기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로 나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전기인상주의를 대신해서 고전인상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포스트인상주의라는 용어를 창시한 로저 프라이의 이와 같은 의도에 따른다면 '포스트인상주의를 후기인상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프라이의 이런 관점은 현대예술사의 이론적인 토대에서 논란이 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포스트인상주가 가진 특성을 혼동시키는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어쨌든 현재는 포스트인상주의라는 용어보다는 후기인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 되어있다.
by Dr. Franz KO(고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