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의 원화 앞에서,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반 고흐

반 고흐의 원화 앞에서,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반 고흐


반 고흐의 원화(原畵)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으면, 온몸의 감각과 영혼의 창이 오롯이 열리는, 신비로운 경험에 빠져들게 된다. 넓어진 동공을 통해 시신경 깊숙이 스며든 도돌도돌한 질감은, 늦은 겨울날 논바닥에 퍼질러 앉아 마른 흙을 만지는 듯 손끝으로 느껴지는 것만 같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면 밀짚모자를 쓴 반 고흐의 땀구멍이 뿜어내고 있는 안개 같은 물방울과, 눈꺼풀에서 이는 자잘한 경련과, 새벽안개 같이 뽀얀 들숨과 날숨과, 지나가는 공기의 흐름이 일으키는 뽀얀 먼지의 부유까지도, 어느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알알이 읽어낼 수 있게 된다.


거기에 반 고흐의 거친 붓질과, 이겨 바른 물감의 물기 빠지지 않은 끈적거림과,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는 유화물감의 향기가 느껴질 때면, 몇 발자국 바로 뒤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즐겁지만 먹먹한 착각에 잠기게도 된다.


특히 마구 이긴 듯 유화물감을 듬뿍 찍어 바른 캔버스 표면을 정신줄 놓고 바라보다가 보면, 선 굵고 골 깊은 붓의 터치에서 LP판의 골을 커다란 둥근 돋보기로 올올히 따라 읽는 것 같은 또 다른 착각에도 빠지게 된다.


그 골을 찬찬히 읽는 것만으로도 그날의 심리상태뿐만이 아니라 성격까지도 알아차릴 것만 같아서 때때로 팸플릿이나 책자에서 보아 온 그것과는 전혀 다른 작품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 날들이 하루하루 쌓여가다가 보면 조금씩이나마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작품에서 느껴지고 있는 그것은 반 고흐의 그것만이 아니라 나 자신의 그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반 고흐의 그림에서 느껴지고 있는 먹먹함이란 게 실상은 나 자신의 어딘가에서 발원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반 고흐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그에게 이입(移入)되어 있는 나 자신의 영혼 때문이라는 것을.


―――――― α ――――――


반 고흐의 붓질을 더듬고 싶어지는 날이면 [더 멭](The MET,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을 찾곤 한다. 5번가를 따라 센트럴파크를 서쪽에 끼고 북쪽을 향해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가 보면 The MET의 전시관으로 오르는 넓고 큰 계단 아래에 서게 된다.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의 본능과 미술관을 찾아 걸어가는 인간의 본능이 그리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계단을 오르면서 문뜩 떠올리게 된다. 다만 그것에서는, 연어의 거친 버둥거림은 종족의 생존을 위한 것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미술관을 찾아가는 것이 또 다른 형태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일 수도 있다는, 크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차이점 정도를 찾아볼 수 있다. 물질적인 빵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어떤 인간에게 미술관은, 형이상학적인 빵을 구워내는 질 좋은 화덕인 셈이다.


밤 고흐의 작품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Self-Portrait with a Straw Hat>, 1887, 40.6x31.8cm)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든 발걸음이 외로이 남겨져 있는 한 켤레의 <신발>(<Shoes>, 1888, 45.7x55.2cm)에게로 옮겨간다. 뉴욕을 살아간다는 것을 여행하듯 살아가는 것이라 여기는 이에게, 금세라도 마른 흙이 풀풀 날릴 것만 같은 반 고흐의 작품 <신발>은, 빈센트 그 또한 삶을 여행처럼 여겼을 것이라는 출처 없는 확신을 갖게 만든다. 이제 알 것 같다. 뉴욕을 살아가는 이에게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순례의 장소이고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은 성인의 초상화이며, <신발>은 그 성지에 모셔져 있는 성물이란 것을.


* 반 고흐의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은 현재까지 5점의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이 중에서 3점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뮤지엄](Van Gogh Museum, Amsterdam)에서, 1점은 미국의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1점은 미국의 디트로이트미술관(Detroit Institute of Arts)에서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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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Self-Portrait with a Straw Hat>, 1887, 40.6x31.8cm

The MET(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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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신발>

<Shoes>, 1888, 45.7x55.2cm

The MET(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빈센트 전시관의 담당 큐레이터에 의해 반 고흐 최고의 작품이라고 꼽힌 또 다른 작품 <삼나무가 있는 밀밭>(<Wheat Field with Cypresses>, 1889, 73.2 × 93.4 cm) 앞에서 멈춰 선 걸음이 전시실 바닥에 들어붙어 버린 듯 미동조차 할 수 없어진다.


Wheat Field with Cypresses1889.jpg

반 고흐의 <삼나무가 있는 밀밭>

<Wheat Field with Cypresses>, 1889, 73.2 × 93.4 cm

The MET(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완벽한 구도와 뛰어나 터치’가 <삼나무가 있는 밀밭>을 반 고흐의 작품들 중에서도 최고로 꼽아야 한다는 그의 설명을 눈과 가슴의 필터 삼아 꼼꼼하게 들여다본다.


누렇게 익은 밀밭을 몰아온 바람이 키 큰 삼나무를 타고 하늘로 올라 구름마저 소용돌이치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그림 속의 풍경에서는 오히려 평온함이 느껴진다. 이글거리는 하늘과 나무와 밀밭이 주고 있는 평온함은 반 고흐 작품에서 받게 되는 아이러니이다. 반 고흐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이라면 그 아이러니를 통해 카타르시스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반 고흐의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아이러니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신비로운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밀밭 사이로 솟아 있는 키 큰 저 삼나무 한 그루는 어딘가에서 만나 본 적이 있는 듯 눈에 익다. 기억을 더듬어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다. 어쩌면 얼마 전 다녀온 파리 근교의 고흐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들판에서 본 것 같다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버릇처럼 사진을 뒤지던 손을 애써 멈춰 세운다.

“그곳이 어디인들, 그것이 아무려면 어떠할까. 틀림없이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살다 떠나간 프랑스의 어느 시골마을 어딘가에 있는, 누런 밀알이 지천으로 매달려 있는 한적한 들판의 어느 풍경일 테니. 그것이면 될 뿐인 것을.”


살아가다가 보면 종종, 그것이 꼭 어디라든가, 꼭 언제라든가 하는 구체적인 사실이 중요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 불현듯 찾아오곤 한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그곳이었으며 그때였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늘 때가 늦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다. ‘지금이 바로 그때’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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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파샹스 에스칼리에의 초상화>

<Portrait of Patience Escalier>, Arles, August 1888,

69x56cm, Tate Gallery, London


다음 전시관을 향해 문턱 없는 칸막이조차 넘어서지 못하던 발걸음이 다시 빈센트의 <신발>에게로 돌아간다. 저 신발의 주인이 그의 작품 <파샹스 에스칼리에의 초상화>(<Portrait of Patience Escalier>, Arles, August 1888, 69x56cm)의 모델 늙은 농부 ‘파샹스 에스칼리에’이건 반 고흐 자신이건 상관없다. 저 신발은 그 또는 그의 무거웠던 삶을 묵묵히 감당하였을 것이기에 객관적이라 불릴만한 배경 이야기 따위는 전시관 바깥으로 멀리 밀어내 버려도 좋다.


어느 날엔가 반 고흐의 모델이 되어 자신의 초라한 나신을 부끄럽게 드러낸 그 순간부터 저 신발은, ‘고흐의 신발’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 저 신발에서 중년의 사내 빈센트의 늘어진 삶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빈센트의 마른 발을, 또는 늙은 농부의 주름진 발을 끼워 담고 집과 집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골목길이며, 밀밭과 밀밭 사이로 길게 난 들길이며, 낮은 나무 우거진 작은 숲 틈으로 난 오솔길을 누비었을 저 낡은 한 켤레와 신발이 어떤 연유에서 이곳 뉴욕의 벽면에 걸려있게 된 것인지, 궁금증은 들판을 날아다니는 검은 까마귀처럼 상상 속을 부유한다.


―――――― α ――――――


삶이 여행인 이에겐 신발의 의미가 조금 더 특별할 수도 있다. 저 허름한 한 켤레 <신발>이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을 낡은 흑백영화 한 편처럼 전시관 벽면에 조사한다.

빈센트의 <신발>을 더듬던 눈빛은 미술관 바닥에 붙어버린 두 발을 내려다본다. 더듬더듬 눈대중으로 사이즈를 맞춰보다가 입술을 살짝 움직여 빈센트의 <신발>을 그림 밖으로 불러내는 마법을 부린다. 풀려 있던 끈을 조여 묶자 약간 어색하면서도 익숙한 편안함을 느낀다. 바닥을 몇 번 툭 툭 차서 켜켜이 묵은 흙먼지를 조금 털어낸다. 올마다 배어있던 삶의 파편들이 전시관 허공을 부유한다.


밀밭사이로 난 좁은 길 저 편에서 옆구리며 손에 무언가를 잔뜩 매달고 있는 깡마른 사내가 뒤뚱뒤뚱 힘겹게 걸어오고 있다. 그의 등 뒤로 내리쬐는 오후의 햇볕에 살짝 눈이 찡그려지지만 어렴풋한 실루엣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 이내 알아차린다. 때로는 얼핏 알아차리는 것이 제대로 알아차리는 것일 수 있다.

Painter on the Road to Tarascon, August 1888.jpg

<타라스콘으로 가는 길 위의 화가>

<Painter on the Road to Tarascon>

August 1888 (destroyed by fire in the Second World War)


by Dr. Franz KO(고일석)@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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