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자들, 자연계의 본능을 읽는 이들: MoMA를

인상주의자들, 자연계의 본능을 읽는 이들: MoMA를 서성거리다가


뉴욕현대미술관(MoMA, Museum of Modern Art)의 전시실 벽면을 눈으로 훑으며 돌아다니다가 보면 유독 머물게 되는 공간이 있다. 삶의 방식이나 직업에서 온 본능 때문일 수 있겠지만 이 네모난 공간 안에 들어서면 '사물이 무엇'이며 '빛은 사물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철학적인 사색과, 그것을 어떻게 하면 이성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과학적인 유희가 물감과 붓질을 따라 뒤엉키면서, 마치 물기 잔뜩 머금은 스펀지처럼 발걸음이 무거워지곤 한다.


누군가 나에게 "그림은 철학서적이 아닌데, 왜 그렇게 힘든 방식으로 읽으려고 하느냐. 그냥 눈으로만 감상하면 안 되느냐."라고 따지듯이 물은 적이 있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읽으려는 것은, 그래서 가슴으로 느끼려는 것은 삶에서 지어낸 '후천적 본능'이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철학적인 사색이나 과학적인 유희나, 형이상학적 행위라는 것에서는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으니 ‘회화예술은 그 자체로서 형이상학적인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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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ma의 인상주의 전시실 전경.JPG MoMA의 인상주의 전시실 전경(자료: MoMA)


전시실 벽면에 걸려 있는 그림들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화가들이 빚어낸 수작들 중에 수작들이다. 그들 일단의 화가들을 하나로 묶어서 인상주의자들(Impressionists) 또는 인상주의 화가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둘 다가 동일한 뜻을 가진 '동의이명'이긴 하지만, ‘인상주의 화가’라는 표현은 어딘가 유순한 감이 있어 주로 문어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고, ‘인상주의자’라는 표현은 왠지 강한 감이 들어 주로 구어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고 있다.


아무튼 그들 작품들에게서 ‘인상주의자의 작품’으로서의 특징들을 더듬어 가다가 보면 그것들의 뿌리가 닿아있는 심연의 바닥까지 사유가 빨려 들어가서, 거대하고 깊은 늪지대를 탐구하는 듯 허우적거리기 일쑤이다. 다행인 것은, 그 허우적거림이 싫지는 않으며 어떻게 해서든 헤집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화가가 캔버스에 붓질을 한 공간의 시간적인 배치와, 그것들에 얽혀 있는 배경적인 요인들뿐만이 아니라 화가의 삶과 철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에, 때로는 이것들과 저것들이 불쑥불쑥 튀어 오르는 것을 감내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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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인상주의자들이라고 불리는 화가들에 대해선, 그리고 그들의 붓질이 탄생시킨 작품들에 대해선, 쓸 것이 많을 수밖에 없고 말할 거리 또한 주렁주렁 매달려 있기 마련이다. 굳이 특정 작품에 대한 구구절절한 비평을 쓰지 않더라도 그동안 쌓아온 머리의 지식과, 긴 시간 동안 느껴온 가슴의 감상을 문어적으로 내뱉는 것만으로도 책 몇 권쯤은 아무렇지 않게 죽죽 써 내려갈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대학교수라는 타이틀로 한 이 십여 년 잘해 먹으며 살아왔으니, 그것도 멀티미디어와 컴퓨터, 인문학과 예술학, 경제학과 경영학을 넘나다니며, 융합적이고 인지적 관점에서 과학과 인문학, 예술학에 대해 어느 한 편으로 기울지 않은 시선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지냈으니, 또한 그 덕분에 영국의 캠브리지(Cambridge, England)에 본부를 둔 The World Congress of Arts, Sciences and Communications의 부의장(Vice Chair)이란 직책을 주워달기도 하였으니, 이것저것 알고 있는 것에다가 귀동냥질과 눈동냥질을 통해 얻은 지식들을 더해 넣게 되면, 그럭저럭 사유의 살점이 잘 오를 게고,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인가엔 시간의 벌어진 틈을 찾아 독백 삼고 리포트 삼은 글 여러 편은 어렵지 않게 긁적거릴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Impressionists, 인상주의자들 또는 인상주의 화가들, 그들에 대한 얘기는 점차 리포트를 넘어 수다스러운 이야기 내지는 넋두리가 되어가기 마련이고 벌써 절반쯤은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예술작품에서 작가의 이야기와 넋두리를 찾아내는 것은, 그리고 그것들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은, 오직 잘 훈련된 감상자에게만 허락된 예술적 유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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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화가, 그들이 캔버스에 담아낸 것은 분명 사물이나 풍경이지만, 때론 빛 자체이거나, 물체의 표면에 부딪혀 산란된 빛에 부유하는 입자들을 끌어 모아 거칠고 세심한 붓질로 풀어놓은 형상 또는 현상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상파란, 고전인상주의라고도 불리는 전통적인 개념에서의 인상주의(Impressionism)와, 네오인상주의(Neo-Impressionism)라고도 불리는 신인상주의 및 포스트인상주의(Post-Impressionism)라고도 불리는 후기인상주의를 포함하여, 인상주의라는 용어가 붙어 있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발현되었던 미술사조 전체를 일컫는 것이다.


따라서 인상주의를 전기인상주의라든가 후기인상주의라는 식으로, 또는 고전인상주의라든가 탈인상주의라는 식으로 나누어 구분하지 않았고 특정한 관점에서의 세부적인 나눔 또한 전혀 고려하지 않았음을 미리 밝힌다. 그것은 어떤 규칙에 따라 배치된 사물들을 그 구성 형태에 따라 풍경이라든가 또는 정물이라는 식으로 부르게 되니 굳이 사물과 정물, 풍경 사이에 굵은 선 하나를 진하게 그을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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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섬세하게 살필 줄 아는 이에게 ‘자연’(Nature, 自然)이란, 투명한 창이 무수히 달려 있는 대저택과 같은 곳이다. 이 창에서 저 창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바깥세상을 향해 눈길을 두다 보면 사물과 사물 간의 경계가 겹치고 뭉그러지면서 부드러운 면의 이어짐이나 선의 연속으로 보일 때가 있다.


더 오랜 시간 그 창가를 지키다 보면 그러한 현상에는 분명, ‘빛’이, 특히 자연의 빛이 어떠한 형태로든 커다랗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또한 인지하게 된다.


사실 사물에 따라서는 모서리나 형체란 것이, 그리 큰 의미를 둘만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빛의 파동성에 의한 떨림이 사물과 그것이 존재하는 공간에 변형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변형은 휨이거나 뒤틀림, 끌어당김 또는 밀침, 더함이나 뺌 같은 왜곡이 만들어낸 현상일 수 있고, 그것들의 조합일 수도 있다. 그 결과 사물이 존재하는 위치는 애초에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를 수도 있게 된다.


따라서 빛의 파동성은 자연계의 사물에게, 떨림 또는 진동이라는 고유한 속성을 부여하게 되고 그로 인해 사물은 확정적인 것에서 벗어난 또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빛의 진동에 노출된 사물의 표면에서는 공간의 변형이 일어나고, 표면 가까이로 다가갈수록 그 정도는 더욱 심해지게 된다. 결국 빛은 공간을 왜곡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며 빛이 일으킨 왜곡에 의해 사물의 경계는 그 절대성을 잃게 된다. 이제 사물의 경계는 붓질이 가는 길이 되기도 하고 점들의 연속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감각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표현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느끼게 되는 것에는, 이러한 공간의 왜곡현상이 시간적으로 관여되어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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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ude_Monet,_sunrise_1872.jpg

모네의 <해돋이>

Claude Monet, <Sunrise>, 1872

48 × 63cm, Musée Marmottan Monet, Paris



인상주의자들, 그들의 그림 속에서 빛은, 사물의 표면 위에서 불규칙한 면 또는 점의 흐름으로 나타나다가 불확정적인 경계와 경계 사이에서 어렴풋하지만 선명하고 환하게 휘몰아치고 있다. 빛의 변화에 따라 공간 또한 변형이 발생하게 되니 그들 인상주의자들이 본 것은, 분명 그곳에 있긴 하지만 그곳에 실체하는 절대적인 개체가 아니라 빛의 영향으로 발현된 어느 찰나의 개체라고 할 수 있다.


변형이란 단어를 부정적인 의미론적 테두리 안에 가두는 것은 세상에 대해 자신의 가슴을 닫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인간의 삶이 구현되고 있는 공간이나 자연계에서, 변형이란 어느 곳에서나 있는 것이며, 어느 시간대에서나 발생하는 일상의 현상일 뿐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 느끼고 있는 것, 생각하고 있는 것들 중에 그 어떤 것 하나도 태초의 형상이나 처음에 부여된 의미를 그대로 지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변형은 가장 자연스러운 흐름이고 그 변형으로 인해 사물이 지닌 태초의 본질은, 오히려 손상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저것이 변형을 통해 살아남아 있는 바로 그것인 것이다. 그 안에서 태초의 본질을 찾아내는 것은 견자(보는 자)로서 해야 할 일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인상주의자, 그들은 태초부터 있어온 무언가를 찾아낸 것이거나, 그것들의 본질을 본 것이기에 그들을 ‘탐구자’ 이면서 또한 ‘보는 자’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눈을 통해 사물의 본질을 그림이란 언어로 써 내려간 것이다. 그곳에 있었음이 분명한 사물의 표면에 도달한 빛은 자연스레 변형을 유발하고, 사물은 그 내면에서, 경계를 해방시켜 본질을 발현하게 만드는 것이다.


변형은 갇히지 않은 사물의 자유로운 본질이고 자연계의 본능이다. 그래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자유로운 상상의 하늘에서 날개를 활짝 편 것과 같이, 제약 없는 이야깃거리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져 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야 알게 된다. 그들이 읽고 그려낸 자연계의 본능이 지금 전시실의 벽면을 채우고 있다는 것을.


Camille_Pissarro_Haying at Eragny.jpg

카미유 피사로의 <에라니의 건초 수확>

Camille Pissarro, Haying at Eragny, 1889, Private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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