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들판에서

고흐의 들판에서


파리는 가깝고도 먼 곳이다. 서울에서나 뉴욕에서나 파리는, 그저 큰 걸음 몇 번이면 도달할 듯 가깝게 느껴지지만 막상은 높은 산들이며 큰 바다들을 넘고 건너야만 겨우 도달할 수 있는 아주 머나먼 세상이다.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은 돌아다녔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익숙해지지도 않을 것 같은 영원한 이방인의 도시가 파리이다. 반 고흐에게도 헤밍웨이에게도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도 파리는, 쉽게 문을 열지 않기에 괜한 끌림의 주술을 부리는 것 같은 마법의 도시이다.


파리를 찾을 때면, 언젠가부터, 조금 더 멀리까지 길을 나서게 되었다. 그곳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는 누런 밀밭 사잇길을 걸어 다니다 보면 ‘빈센트 반 고흐’라는, 지독하게 고집스러웠고, 처절하게 고독했던 한 그림쟁이 사내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 Sur Oise)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파리 근교 마을의 뒷동산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파리의 돌집 사이로 난 돌길을 걷는 것과 오베르 쉬르 우아즈 뒷동산의 밀밭 사이로 난 흙길을 걷는 것이, 또는 파리지앵의 길을 걷는 것과 반 고흐의 길을 걷는 것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날부터 ‘고흐의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또 다른 파리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파리가 또 다른 오베르 쉬르 우아즈일 수도 있기에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


밀밭사이로 난 길_오베르의 들판.jpg

고흐의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밀밭 사이로 난 길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마을 뒷동산 들판 스케치

반 고흐에게 내리쬐었던 마지막 햇볕과 그의 주름진 얼굴을 쓰다듬었을 마지막 바람을 기억하고 있을 들판의 끝자락에는 초록의 삼나무 몇 그루가 하늘을 향해 우두커니 솟아 있고, 멀리 지평선 끝자락에 닿을 만큼 길게 이어진 밀밭과 밀밭 사이로 난 누런 황톳길은 나른한 오후의 빛을 맞으며 게으른 고개를 꼬박거린다.

진청색 물감을 흩뿌려 놓은 것 같은 둥그런 하늘에 어둑어둑 어둠이 번져 들면 어디에선가 불쑥 튀어나온 노란 별빛이 빙글빙글 어지럽게 소용돌이치고, 이리로 저리로 아무런 고집 없이 부유하는 허연 구름은 금세라도 터져버릴 것 같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그 하늘 아래에서는 밤 보다 더 검은 옷을 켜켜이 껴입은 작은 새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있다.


고흐의 들판에서

고흐의 들판은 짚단을 엮어 올린 초가집 지붕에 슬쩍 걸린 저녁 햇살처럼 나른하기도 하고 누런 한지를 더덕더덕 이겨 바른 시골집 벽면처럼 마냥 정겹기도 해서 누추한 상차림에도 아무 부끄럼 없이 부른 벗과 이빨 빠진 막걸리 사발을 기울이는 것 같은 거나함에 시간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들판에 박혀 있는 반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에 눈길을 빼앗기다 보면 구름이 흐르는 모습이나 별빛이 반짝이는 형상이 까마귀가 후루룩 날아가는 모습과 닮았다고, 문득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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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들판에 서 있는 고흐의 그림 <까마귀가 나는 밀밭>

사실 까마귀가 어떻게 보이느냐는 눈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일 수 있다. 이곳에서 까마귀는 사람의 눈이 보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에 보이는 능동적인 개체이다. 또한 ‘검다’는 것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은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바라보는 마음의 문을 좁힐 뿐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고흐의 까마귀를 ‘어둡다’ 또는 ‘스산하다’와 같이 자신의 느낌에 빗대어 부정적으로 얘길 하곤 한다. 게다가 까마귀에 대한 일반적 편견과 그 비행 행태를 시빗거리 삼아 만나본 적도 없는 고흐의 심리 상태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운운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가만히 그 얘기들에 귀를 기울여 보면 얼핏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이내 손사래를 치게 된다. 사실 세상이 뭐라고 하든 상관할 바는 아니다. 어차피 빈센트는 더 이상 말이 없으니 보는 이의 생각은 밀밭 위를 나는 까마귀 무리처럼 그냥 자유로워진 대도 괜찮겠다.


행여 [반 고흐의 마을]이란 별칭이 없다면 [오베르 쉬즈 우아즈]라는 마을의 이름을 그냥 흘려들었을 뻔했다. 마을길을 따라 고흐가 오르던 언덕길을 걸어 오른다. 한 십 여분을 그렇게 걸었을까. 커다랗게 펼쳐진 밀밭 가운데에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그림이 세워져 있다. 그림을 가둔 각진 틀이 딱딱할 만도 한데 그런 느낌일랑은 일체 느껴지지 않는다. 밀밭과 밀밭 사이로 난 좁은 길에 파란 하늘을 미술관의 벽면 삼아 걸린 그림에서는 신비함마저 풍겨 나고 있다.


상상의 들판 길을 걸어간다. 톡 톡 손가락을 휘저으며 한 마리 두 마리, 까마귀의 수를 세다가 얼른 바지 주머니 속으로 손을 찔러 넣는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숫자를 헤아리는 본능 따위는 잠시 잊었어도 좋았을 것을.

저 까마귀들이 지금 막 하늘로 오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 막 밀밭으로 내리고 있는 것인지 문득 궁금하다. 생각의 갈래는 바람을 따라 몰려다니는 들판의 밀처럼 이리저리로 휩쓸려 간다.


“그는 밀밭 위 하늘로 오르고 싶었던 것일까.”

“반 고흐 그는 저 누런 파도 위에 후드득, 별빛처럼 내려앉고 싶었던 걸까.”

“빈센트는 떼를 지어 나는 까마귀를 보면서 자신의 고독을 떠올렸을지도 몰라.”

“저 까마귀 중에 유독 더 검은 저 한 마리가 어쩌면, 빈센트 그이지 않을까.”


살아가다 보면 주어질 답보다 질문이 더 많아지는 때가 있다. 어제도 그런 날이었고 오늘도 그런 날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자동차는 파리를 향해 달리고 있지만 고개는 자꾸 뒤를 돌아본다.

“다행이다, 세상엔 남겨둬야 할 것이 저리도 많아서.”

어둠이 내리자 카페의 불빛을 찾아 파리의 밤거리로 나선다. 파리의 골목길에서 고흐의 마을 오베르 쉬즈 우아즈의 밀밭을 불어 가는 바람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by. Dr. Franz KO(고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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