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에게는 글을 쓴다는 것이 ‘살아있음’을 알리는 강력한 수단이자 '살아야만 함'에 대한 치열한 변명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면 살아있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인지, 글을 쓰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인지는, 금세 뒤집히는 손바닥과 같아서 어느 하나로만 규명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글을 쓰는 이나 그것을 읽는 이 모두는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이다. 생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사피엔스’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사용해야 할 정도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이 우리라는 인간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분명 우리 모두를 향해 열려 있는 숙명이자 기회이지만 ‘글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에게는 조금의 질문이 거기에 더해지게 된다. 그중에 하나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생각하는 인간인가 사유하는 인간인가?”
"생각하는 인간이 글을 쓰는 것과 사유하는 인간이 글을 쓰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이 문제에 있어 ‘행여 답일 수도 있는 무엇’인가를 뒤적여내기 위해서는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라는 학명을 다시 소환시킬 필요가 있다. 인간을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라고 분류한다는 것은 ‘인간이란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이에 대해 학자들과 선지자들은 저마다의 해석을 다양하게 내놓고 있지만 저자의 경우에는 ‘사유하는 인간이 바로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라고, 오래전부터 말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이며, 사유는 우리가 ‘진정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형이상학적인 행위라는 말이다.
헤르만 헷세의 <유리알 유희>를 떠올려 봐도 좋다. 헷세가 유리알 유희의 명인을 수학의 명인이나 음악의 명인과 같은 명인들을 넘어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른 궁극의 명인으로 본 것 또한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유리알 유희를 한다.”는 것이 “사유한다.”는 것이며 사유가 넘쳐나는 곳이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이고 꽃들의 향기가 어우러진 쉴만한 물가인 것이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가, 당연히, ‘생각’이란 것을 한다. 사유와 생각을 연결 짓자면 ‘사유는 지적 유희를 통해 이루어지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사유하는 인간이 모여드는 장소를 ‘사유의 아고라’라고 볼 수 있게 된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식으로 ‘그곳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곳에 속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사유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정리야말로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에게 글쓰기가 가능하도록 하는 원천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사유와 언어는 인간이 그곳에 속하도록 하는, 즉 인간이 존재하도록 하는, 마법의 지팡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는 ‘사유와 언어로 자아(self)를 펼치는 존재’ 그래서 ‘어떻게든 문장을 써내려야 만 하는 존재’가 된다.
또한 생각하는 능력을 넘어 사유하는 능력이 발현시킨 학문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가진 능력 중에서 생각하는 능력은 과학과 실용적인 학문을 이끌어 왔고, 사유하는 능력은 예술과 철학과 신학을 견인해 온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지만 ‘사유하는 존재’라는 측면에서는 무수한 해석을 낳고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유와 언어를 통해 존재의 거소지이자 집을 찾아가는, 그곳에 있으면서 그곳에 속하려는, 그래서 결국에는 실체 하고 싶은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의 본능적인 행위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생각하고 생각하는 존재하는 이, 사유와 언어를 영혼으로 다룰 수 있는 이가, 열려있긴 하지만 빗장을 꼭꼭 걸어 닫으려 하는 것이, 어쩌면 글쓰기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