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에는 또 하나의 계절이 다가서 있다. ‘어느새’라든가 ‘또다시’와 같이 단어로 이루어진 수식어 따위는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괜히 울컥해질 때면 그저 ‘아’ 하는 신음소리를 짧게 흘리면 족하다. 커피를 마시다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느 한 계절, 어느 한 때라도, 길을 나서지 않은 적, 길 위에 서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면 살아간다는 것은 늘 좁은 골목길에서 맴돌던 발자국소리의 공명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삶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갈림길을 맞이할 때면 어디로 들어서야 할지, 어느 길을 향해 걸음을 디뎌야 할지 머뭇거리기 마련이었고, 유혹과 갈등이 빚어낸 때마다의 첫걸음은 늘 예기치 못한 또 다른 길을 향해 삶을 이끌어왔다.
지금의 길은 분명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길이라고, 바람인지 시간인지 알아차릴 수 없는 누군가가 속삭이고 있다. 그것은 이 길이 뿌연 안갯속을 헤맨 끝에 손을 더듬거려 찾아낸 구불구불하고 좁은 소로이기 때문이다.
양손 가득 누려온 것들을 움켜잡은 채로는 이 길을 제대로 걸어갈 수 없음을 알게 된 어느 날, 손바닥을 툭툭 털고 몸에 걸친 것들을 하나씩 벗어 내렸다. 그것은 타의로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그런 것이라고, 적어도 그렇다고 믿어야만 했다.
내려둔다는 행위에 대해선 그것이 수동적인 것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 행위가 일어난 순간이 중요치는 않고 ‘내려선 행위’의 자체로 인해 걸음걸이가 크게 변화하기 마련이다.
하나의 길을 잃었을 때에야 비로써 또 다른 하나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온전한 삶을 살아온 이라면 익히 익혔을 자기 위안의 방식이다. 비록 내려선다는 것이 ‘길을 잃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내려섬은 무언가를 비워냄으로써 또 다른 하나의 길을 맞이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임이 분명하다.
하릴없이 나선 밤의 걸음이 어느 기차역의 터미널, 늦은 하루의 대합실에서 멈춰 선다. 안내방송을 따라 떼를 지어 오가는 이들의 소란이 천정 높은 콘크리트 공간에서 웅 웅 맴돈다.
이십 대의 젊던 시절, 손을 질러 넣은 주머니에 동전 몇 개가 만지작거려지고 지갑 속에서는 네모난 종이 몇 조각이 헤아려질 때면, <비둘기호>란 평화로운 이름으로 불리던 기차의 차창에 텁수룩한 머리를 기대 붙이곤 했다.
자잘한 진동을 전달하던 폭 좁은 좌석의 쿠션은 기차를 기다리며 앉아있었던 철로 옆 벤치의 느낌과 그리 다르지 않았고 철커덕철커덕 소리에서는 사람의 떠남과 들어옴이, 추억의 다가섬과 멀어짐이, 시간의 생성과 소멸이 동해바닷가의 파도처럼 교차하고 있었다.
길게 이어진 철길을 바라보며 몇 가지 정보가 박혀있는 작은 종이를 만지작거리는 사이에 몇 대의 밤기차가 이리저리에서 다가와서는 이리저리로 멀어져 간다. 무엇인가가 그들의 등을 떠미는 듯 우르르 떠나가고 와르르 들어오는 사람들의 표정은 그저 무심하기 짝이 없고, 떠남과 도착이라는 것은 그저 그 순간을 의식하고 있는 누군가의 감상이 만들어 낸 실체 없는 허상인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도착하는 이는 누구인지, 가는 것과 오는 것의 분별이 점점 어려워져 가고, 내가 왜 여기 서있는지조차 아득해져 간다. 떠남과 들어옴이란 건, 어쩌면, 얇은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일란성쌍둥이 형제일 수도 있어 보이고 이곳은 헤어짐과 만남만을 공연하는 소극장의 무대인 것 같게도 느껴진다.
버리려고 했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오랜 버릇이었다
떠나간 기차는
어떻게든 밀어내어야만 했다
저기에서 기차가 들어온다
채워지지 않고서는
결코 버릴 게 없다는 것은
구질구질한 집착이 만들어낸
구차스러운 삶의 핑계일 뿐이다
출발한 곳을 알 수 없는 기차는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채움과 버림이란 게
서로 다르지만은 않다는 것을
채우지도 버리지도 못한 채로
겨우 알아간다
밤의 기차역에서
기차는 검은 바람이 되어
어둠을 향해 떠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