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돌아가는 벤자민 버튼의 시계처럼, 그것이 고장 때문이건 어떤 역할에 의해서이건, 시간의 바늘은 그때 그곳,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지내던 도시의 어느 구석진 시공간으로 흘러 들어간다.
어지럽게 흩어진 낡고 누런 책들이 뿜어내고 있는 퀴퀴한 호흡과 닦은 기억 없는 좁은 창을 넘어 방 안 깊숙이 들어선 햇살에 부유하던 메케한 담배 연기와, 참 크래커 부스러기가 검누런 장판 위에서 흑갈색 맥스웰 커피가루에 엉켜 붙은 나른한 찐득거림 속에서, 나라고 얘기되는 이름 석자에 대해 깊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 든 적이 있다.
분명한 기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때 거기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에 대한 고민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나의 자아를 찾아가는 길에, 꼭 헤쳐 나가야만 하는 파도 거친 냉랭한 바다이자 뜨거움에 메마른 사막과도 같은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성(姓)이라고 하는 것이 '혈족(血族)을 나타내기 위하여 붙인 칭호'라고 정의되어 있기에 가족이란 공동체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임에는 다른 어떤 논쟁의 여지를 찾아낼 수 없었다. 인간의 역사가 이룩한 사회적 합의까지를 무시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어쨌든 성은 한 가족의 동질성을 나타내는 ‘Family Name(가족 이름)’이고, 그렇게 받아들여지게 된 것에는 “그것이 분명하다.”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대를 이어가며 내려왔을 것이기에, 그것에 대한 더 이상의 고민은 헛된 짓일 수밖에 없었다.
덧붙이자면 사람의 성을 ‘Last Name'이라는 부르는 것에서는 그것이 '최종적인(last) 것'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최종적'이라는 단어가 "의무는 가져야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권한은 주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에, 인간에게 붙어 있는 '라스트 네임'으로서의 성은 '결코 거역할 수 없는 아주 이기적인 궁극의 것'이란 것을 또한 알게 되었다.
결국 사람의 이름에 붙어 있는 성이란 것은, 그 사람의 몸속을 흐르고 있는 검붉은 피와 같아서,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태초에' 부여받은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성에 어떤 형태로든 변형을 가할 수 없다는 것이 성에 대한 고민의 최종적인 결론이었다.
이에 반해 ‘Given Name(주어진 이름)’ 또는 ‘First Name(가장 먼저 부르는 이름)’이라 불리는, 누군가 자신에게 붙여 준 이름에는, 상황이나 자의에 따라서 어떤 변형을 주거나 또 다른 의미의 부여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당시 책상머리에 꽂혀 있던 알베르 카뮈의 후기 작품들인 <페스트>와 <정의의 사람들>, <반항인>에서의 주제인 ‘반항’의 어설픈 흉내 내기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음을, 젊은 날의 이유 없는 반항기가 부린 사술 같은 해괴한 짓이었을 수 있음을, 부끄럽지만, 이제는 고백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세월이 묵으면 인간은 지난 일들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용기는 자칫 ‘나의 든 이의 완고함’으로 비칠 수도 있다.
아무튼 세월은 사람에게 괜한 솔직함을 불어넣거나 쓸모없는 무모함을 주는 몹쓸 마법을 부리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것들에게 용기라는 단어로 치장할 수도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 막상은 지난날의 삶에 대한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시절엔 입 밖으로 뱉어내지 못했을 고백을 이젠 마치 자기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저질러졌던 일인 양, 그래서 아무런 느낌 없는 듯 떨림 없는 평온한 목소리에 뱉어낼 수 있게 된 것은, 언젠가부터 세월의 권능에 굴복해 버린 스스로의 현명함 덕분이라고 여겨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