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에 눈이 멀어 괜한 난독증에 빠지게 되는 것을, 그리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겠다. 행여 빛의 눈부심으로 인해 그것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게 된다면, 형체로서 더듬으려 들지 말고 마음으로 읽으려고 해야 한다. 너무 환하게 빛나는 것은 눈을 멀게 만들기 때문에, 비록 잠시나마일지라도, 사위를 분간하기 어렵게 되고 그로 인해 방어본능의 울타리를 높이 쌓아 올리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눈이 부시다.
얇은 천으로 가린 살갗의 돌기에 물기가 맺힌다.
빛 때문인지 물거품 때문인지,
마치 어항 속에서 입을 뻐끔거리는 것처럼
모든 것이 축축하고 뿌옇다.
저 불빛이 너무 밝다.
이 성전이 행여 어항이라면
나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의 숭배가 떠난 성전에서 신의 권능은 오직 피조물의 손끝으로 탄생시킨 형상으로만 존재하고 있다. 누가 누구에게 호흡을 불어넣었다는 것인지, 누구로 인해 누가 존재하게 된 것인지 혼동스럽다. 하지만 화려함에 무겁게 눌린 영혼을 마주하는 것이 오히려 평온하기까지 하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피어남의 절정에서 신을 향한 경배가 쏟아지는 것을 보면 아마도 신의 품속에서 살아가던 날에 대한 동경이 내 몸 어디엔가 남겨져 있었나 보다.
우러러보는 대상을 향한 막연한 복종은 자신의 탄생설화를 잊어버린 인간에게 내려진 형벌일 수 있다. 이 화려한 성전에서 가슴 떨군 눈빛의 고해는 보잘것없는 스스로만큼이나 빈약하기 짝이 없다.
왜 이리 눈이 부신 걸까. 저 빛의 밝기와 내 삶의 밝기 사이의 간격이 대체 얼마나 멀어져 있기에 제대로 눈을 뜰 수 없는 것일까. 어떻게라도 더 크게 눈을 뜬다면 빛에 대한 면역력이 적응시로 나타나게 되고 그제야 마음의 눈을 뜰 수 있게 될까.
저곳에는 밝음과 어둠이라는 상반되지만 경계를 나누기 어려운 두 개의 세상이, 진한 것과 연한 것이라는 농담의 정도로만 그 바탕에 깔려 있을 뿐일 수 있다. 그러니 세상은 흑백논리라는 무채색의 비이성적인 지식이 지배할 수밖에.
이렇듯 여행지에서 만나는 명도조차 동공의 받아들임이 다르고 가슴의 해석 또한 다르니 지극히 상대적인 인간의 감상이 어둠과 밝음이라는 이성적인 현상에 자위적 개념을 부여하고 있고, 그 결과 비이성적인 것이 된 것은 아닌지.
어쨌거나 저 밝음이 인도하는 곳은 길이 없는 길이다. 애초에는 길이 있었을 수 있지만 언젠가부터는 그렇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 그곳으로 가는 입구를 찾는 것은 어렵기 짝이 없는 일이고 행여 찾게 되더라도 그 초입에 걸음을 디디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