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의 중반은, 그때까지는, 캠퍼스라는 성전(聖殿)에 거처를 두고 살아갈 수 있었던 ‘그 좋았던 시절’의 끝자락이었다. 젊은 날의 캠퍼스는 젊은 날의 어니스트 헤밍웨이에게 파리가 그랬던 것처럼 ‘날마다 나만을 위한 축제’를 열 수 있었던 작지만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하지만 캠퍼스의 하늘을 밝히는 태양은 이미 서쪽으로 잔뜩 기울어져 있었고 이십 대의 고갯길을 오른 발걸음은, 아무리 버둥거려도, 아래를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캠퍼스는 나에게만 열려 있는 ‘영원의 성전’이 아니었고 누구나에게 열려 있는 ‘거쳐 지나가는 한 시절의 성전’이었음을, 아주 후일에 가서야 깨닫게 되었다. “깨달음은 늘 때가 늦어서야 찾아오는 짓궂은 녀석이다.”라는 누군가의 푸념 어린 문구는 아쉽게도 언제나 진리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 좋았던 시절의 그 공간은 단지 몇 년이란 시간 동안만 허락된 것이었기에, 언젠가는 놓아주어야만 했고, 남겨진 추억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것이었다고 여겨야만 했다.
“그래, 시간은, 잔인하리만큼 참으로 공평한 것이지.”
그날도 통기타를 튕기며 벌렸던 초저녁 소주판의 취기를 머금고 캠퍼스의 옆구리에 뚫려 있는 쪽문을 넘어섰다. 곤드레만드레라는 표현을 쓸 것까지는 아니지만 거나해진 발걸음은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방랑질 삼고 동냥질 삼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현실 세상에 내린 삶의 뿌리가 통째 뽑혀나가는 일 따위는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리저리로 굽어진 몇 개의 골목길과 골목길을 지나 붉은 등을 꼬리에 달고 기어 다니는 차량으로 가득 찬 거리와 거리를 방향 없이 돌아다니다가 동네 어귀 시장을 가로지르는 휘어진 길에 들어섰다. 당시에는 아마도, 간섭할 일 아무것도 없고 간섭당할 일 하나 없는 외진 도시길을 돌아다니는 것을, 세상의 어둠을 벗 삼아 떠돌아다니는 유랑자의 여유라고 혼자서 위안하였던 것 같다. 그럴 때면 머리에 삿갓을 쓰지는 않았지만 가슴에는 이미 커다란 삿갓을 쓰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곳이 어디쯤인지, 얼마나 돌아다닌 것인지, 어디까지 걸어간 것인지에 대해 분별력의 지원을 받아가며 기억해 낼 도리는 없다. 하지만 파란색의 페인트가 덕지덕지 덧 발린 횟집 수족관 앞에서 불현듯 걸음이 멈추어 섰다는 것만은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사실 인간의 기억을 ‘지극히 객관적인 것이 머릿속에 새겨진 것’이라고 확신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 그날의 상황 또한 어쩌면 눈을 뜬 채로 꾼 꿈의 한 자락이거나, 혈관을 돌아다니던 알코올이 일으킨 화학적 환영이거나, 밤안개가 뿜어낸 정서적인 환상일 수 있다고, 가끔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것이 어찌 된 것이 건 그 자리에서 길을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그날의 돌아다님 또한 알코올을 섭취한 다른 여느 날의 행적과 그리 다를 바는 없었다. 하양과 파랑을 두껍게 덧칠한 수족관의 파란색이 시원한 바다를 연상시키기보다는 수영장 바닥에 으깨어 발라 놓은 미끌거리는 파란색을 떠올리게 만들었던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을 것이다.
짧고 좁은 수족관에 갇혀 하염없이 입을 뻐끔거리는 커다란 물고기에게 뺏아긴 시선은 쉽게 거두어들일 수 없었다. 텅 빈 수족관에 남아 있는 한 마리 물고기에게 쏟아지는 불빛은 가혹하리만큼 밝았다. 회전 느린 영사기의 조사를 보는 듯한 물고기의 느릿한 움직임은 마치 살아 있는 채로 박제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들었다. 먼지 낀 60촉 백열등의 불빛은 수족관 내부만이 아니라 지나가는 바람의 눈조차 멀게 만들려는 누군가의 음흉한 수작을 숨기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 지난 어느 날부터 생각하게 되었다.
"그 물고기에게는 그 수족관이 성전이었으며 자신의 눈을 멀게 만든 백열등은 성전을 밝히는 성스러운 촛불이 아니었을까."
돌이킬 수 없이 결말이 정해져 있는 것을 ‘운명’이라고 한다면 물고기 또한, 그날이나 그다음 날에는, 자신의 운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전에서는 운명(運命)을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하여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라고 정의하고 있다.)
세상의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수족관의 물고기와, 그것을 밝히는 백열등이 새겨 놓은 그날 그곳의 잔상들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금의 이곳으로 찾아든다. “추억의 질량은 얼마나 될까?”라는 물음을 가져 본 적이 있다. 물리학적으로 본다면 오직 질량이 없는 것만이 빛의 속도로 이동할 수 있고, 시간과 공간의 왜곡을 피할 수 있다. 따라서 추억을 ‘그때 그 공간에서 분명 있었던 것’이라고 믿는다면 추억의 질량은 분명 제로(zero) 일 것이다. 그래야만 추억이 부지불식간에 시간과 공간을 넘어오는 것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추억에 가해진 왜곡과 채색이 추억에게 질량을 부여하게 되고, 결국에는 추억의 소환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추억의 질량은 사람에 따라, 그리고 추억에 따라, 또한 물리적이고 정서적인 상황에 따라, 제로에서부터 무한대라고 할 수 있게 된다.
"그 추억의 질량은 얼나마 되는 걸까."
입을 살짝 열었다가 닫기를 느리지만 반복한다. 지식을 쌓으면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집착 서린 믿음이, 수족관 안에 홀로 남겨져 있던 그날의 덩치 큰 물고기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왜소한 나나, 눈을 뜬 채로 눈이 멀어가는 어리석음을 그저 뻐끔거리는 입짓으로 달래려고 만드는 것은 아닌지, 대답해 줄 이 없는 질문에 빠져들게 한다.
저기 저 백열등이 너무도 밝아
너무 부신 빛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어
함께 있던 녀석들은 어디로 간 것인지
저 밝은 빛 때문에 아무것도 알 수 없어
누가 있는 것일까, 이 어항 안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이 어항 밖에는
어디로 가게 될까, 이 어항 벗어나면
저 밝음에 길들여진 눈 때문에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어
이젠 눈 감을 수 없는 이 밝은 빛이
그리 어색 치는 않아
너무 환한 밝음은 어둠과 같은 게야
지식의 눈이 환하게 밝아갈수록
지혜의 투명함은 눈 뜬 채로 멀어져 가는 게야
진정한 신성은, 화려함과 크기에 놀라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양 떼들의 눈먼 고해에 담겨 있지는 않을 텐데, 양치기들의 욕심이 신과 인간의 거리를 더 멀게 만든 것은 아닐까. 겹겹이 색을 입힌 인간의 허영심을 말간 무채색의 필터로 걸러낸 인간의 무릎 꿇음이 진정한 성전에서의 고해가 아닐까.
아침이면 동쪽을 향하고 저녁이면 서쪽을 향하는 가슴의 창이 성전을 밝히는 진정한 창이 아닐까. 나를 읽으려는 누군가의 눈빛을 아무런 부끄럼 없이 받아들이게 하고, 보잘것없는 중얼거림이라도 눈먼 고해가 되지 않게 하는 영혼의 창이 진정으로 아름다은 성전의 창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