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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 트라우마의 승화가 낳은 문학적 미학

단테의 신곡, 트라우마의 승화가 낳은 문학적 미학 - 첫 번째 이야기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는 ‘위대한 지성 단테’(단테 알리기에리, Dante Alighieri, 1265-1321)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르네상스를 떠올리지 않는 피렌체를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단테가 없는 피렌체를 돌아다니는 일은 한낱 눈먼 이방인의 어색한 더듬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피렌체에서 만나는 단테는 <신곡>(The Divine Comedy, c.1308-c.1321)뿐만이 아니라 더 깊고 다양한 것들을 연상케 만든다. 대중에게는 <단테의 신곡>이라는 하나의 문장만이 입술에 새겨져 있지만 피렌체의 하늘을 불어 가고 있는 바람은 <피렌체인 단테의 신곡>이라고 속삭인다.

 

/* 단테의 <신곡>은 시구(詩句)로 쓰인 14세기의 작품이다. 단테는 이 작품에 ‘코메디아’(희곡)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것은 단테가 살아간 당시에는 ‘결말이 행복하게 끝나는 작품’을 희곡(코미디)이라는 범주에 묶었기 때문이다. <신곡>에는 베아트리체와의 사랑을 행복으로 결말짓고 싶은 단테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


<신곡>은 단테가 1308년 경에 집필을 시작하여 세상을 떠난 해인 1321년까지, 약 13년에 걸쳐 집필한 작품이다. 나이로는 마흔세 살에서부터 쉰여섯까지에 해당한다. 단테가 <신곡>을 집필한 기간은 그의 인생 전성기 대부분에 해당한다. 따라서 <신곡>의 텍스트에는 단테의 사상과 철학뿐만이 아니라 인생 전반이 오롯이 스며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신곡>을 탐미한다는 것은, 인생에서 뿐만이 아니라 문학에 있어서, 또한 철학과 사상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성숙의 절정에 오른 단테'를 만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인 것이다.


여기에서 독자들은 알아차리게 된다. <신곡>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테의 인생을, 더 나아가 베아트리체와 단테의 관계를, 단지 가십거리로서가 아니라 좀 더 섬세한 시선으로 면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 ***


단테의 삶과 문학을 쫓는 일은, 그의 역작인 <신곡>에서, '트라우마'와 ‘열등감’의 짙은 그늘을 발견하는 것에서 하나의 쉼표를 찍을 수 있게 된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쉼표라는 것이, 단지 시간을 두고 '쉬어갈 만한 물가의 쉼터'와 같은 것일 뿐, 결코 종착점을 의미할 수는 없다.


방향을 조금만 틀어서 바라보게 되면 <신곡>에 나타난 트라우마의 짙은 그늘이, 단테가 가졌던 열등감의 어둠에서 발원한 것임을 알아차리게 될 때, 비로소 작품의 시적 텍스트와 단테의 삶과 사상에 대한 이해가 하나의 궤도에 오를 준비를 하였다고 말해도 좋다.   


베아트리체를 향한 단테의 사랑은, 혼자만이 품었던 짝사랑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베아트리체의 외면은, 비록 그것이 그녀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단테에게는 결코 지워낼 수 없는 날카로운 상처를 남겼다.


인생의 풋풋한 시절, 혼자만의 짝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더 깊고 아픈 상처를 가슴에 새긴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짝사랑을 이룰 수 없는 이유는, 짝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떠올려 볼 수 있는 것들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도 복잡하다.


어쨌든 어떤 짝사랑은, 그렇게 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배신감’의 발원지가 되기도 한다. 베아트리체로 인한 단테의 상처는, 그녀를 향한 단테의 집착과 열등감에서 돋아난 배신감에서 그 싹을 찾아볼 수 있다.



단테의 작품을 통해 추측할 수 있는 ‘베아트리체에 대한 단테의 열등감’은 그의 시적 텍스트만큼이나 미묘하고 복합적이다. 이것을 애써 따져 문장으로 구분하자면, 단테의 가문과 베아트리체의 가문의 신분 상의 격차로 인한 사회적인 열등감과, 단테 자신과 베아트리체의 외모의 차이에 따른 신체적인 열등감이라고 할 수 있다.


단테와 베아트리체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어쩌면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커다란 사회적 장벽이 놓여 있었다. 그 장벽은 두 가문의 신분 상의 격차에서 온 것이다. 당시 베아트리체의 집안은 피렌체 최고의 가문이었지만 단테의 집안은 그렇지 못했다. 단테와 베아트리체는 완전히 다른 ‘사회적 DNA’를 지니고 있었다. 그로 인해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할 수 있었고 한마디 말조차 제대로 건네어 볼 용기를 낼 수 없었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Dead Mask>



또한 베아트리체는 남자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자들까지도 찬사를 보낼 만큼 아름다운 여성이었지만 단테는 그렇지 못했다. 단테의 외모는 그의 <Dead Mask>와 여러 초상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아주 못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베아트리체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못생긴’ 것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단테가 못생겼다고 하는 것에는 그의 사회적 배경 또한 큰 몫을 차지했다고 봐야 한다. 사회적 배경이 좋은 남자라면, 그 외모와 상관없이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할 수 있는 것은, 단테가 살았던 시절에만이 아니라 지금에 와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사회적 배경이 좋은 남자는, 좋은 집을 소유하고, 고급진 의복을 몸에 두르고, 몸짓과 말투에서는 교양미가 풍겨나며, 값 비싼 장신구로 몸을 치장하기 때문에, 외모에 있어서도 그 사람의 ‘절대적인 생김새’ 보다 훨씬 후한 평가를 받게 된다.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에 있어 단테는 일종의 <외모 콤플렉스>를 가졌으며 이 콤플렉스가 열등감의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콤플렉스의 뿌리 일부분이 사회적 신분상의 격차에도 내려져 있기에 단테의 열등감은, 그의 문학과 철학만큼이나 복합적이면서도 미묘한 것이다.

      

이와 같이 단테가 베아트리체에게 다가갈 수 없었던 것은, 사회적 신분의 격차와 외모의 차이와 같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결코 넘어설 수 없었던 ‘태생적인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


인간이 갖게 되는 배신감의 원인은 굉장히 다양하다. 어떤 배신감은 '자기 자신'을 그 원인으로 지목하지만, 대부분의 배신감은 '바로 그것 때문'이라거나 '바로 그 사람 때문‘이라는 식으로,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것 또는 다른 사람’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내려고 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그 원인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게 된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걸쳐 찾아낸 ‘배신감의 원인’은, 그것이 있었던 것이건 그렇지 않은 것이건, 그것의 실체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것 또는 그 사람이 원인’이라고 지목되는 것에게만 전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자신이 그것의 원인임이 분명하지만,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것 또는 타인에게 원인을 전가시키는 것도 불사하는 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것은 ‘자기변명을 통해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은, 인간이 태생적으로 타고난 본성 중에 하나이며 '자기변명의 본능'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대상을 물색함으로써 스스로의 방어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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