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단테의 사랑 그리고 통속의 미학

단테의 사랑 그리고 통속의 미학


단테가 베아트리체로 인해 받은 상처는 그녀의 ‘외면’으로 인한 것이다. 의도된 것이건 그렇지 않은 것이건 베아트리체의 외면은 단테에게 씻을 수 없는 배신감과 트라우마를 새겨 넣었다.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외면한 것에 대해 ‘2번’이라는 횟수를 적시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숫자를 좋아하는 이들의 편향된 의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베아트리체의 외면은 단지 단테의 짝사랑에서 비롯된 그 횟수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사랑은 두 사람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일어나야 하는 것이지만 베아트리체를 향한 단테의 사랑은 단테 혼자만이 쏟아부은 일방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베아트리체로서는 미처 인지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그녀는 단테와의 사랑에 대해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 미인지는 결코 죄가 아니기에 베아트리체는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그녀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을 뿐이다. 


<신곡>에서 베아트리체가 지옥으로 보내지지 않았다는 점을 통해 단테 또한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향한 사랑에 대해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려고 발버둥 쳤으며 그 결과물이 <신곡>이라고 볼 수 있다. 실패한 사랑의 경우 대게는, 그것에게 모종의 사회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어떻게든 책임을 찾으려고 하게 되지만 단테는 그것에게 종교적 의미를 또한 심어 넣음으로써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베아트리체에 대한 단테의 감정은 <신곡>의 텍스트에 나타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했을 것이다. 그것은 비록 '버린 자'에게는 죄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버림받은 자'는 전혀 다른 입장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짝사랑이었기에 베아트리체는 ‘단테를 버리는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단체의 입장에서는 비록 미인지적인 상황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버림받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게 된다.      


흔히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버림받은 자에게 ‘배신감’이라는 파괴적인 단어와 결부되게 만든다. 그로 인해 상호작용이나 상호인지가 되지 않았던 어떤 것들에 대해서조차 ‘약속’이란 단어로 옭아매고 종국에는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약속을 저버린 자’라는 꼬리표를 달아 메어, 그것에 대해 배신감의 씨앗을 심게 된다. 이윽고 발아된 그 배신감은 스스로가 ‘버림 당한 자’라고 믿는 자에게 치명적인 상처와 트라우마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며, 혼자만의 분노와 혼자만의 용서라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오르내리게 만든다.  

    

단테에게 베아트리체는 ‘사랑을 저버린 자’, ‘나를 버린 자’를 넘어 ‘배신을 행한 자’이며 트라우마의 근원이다. 배신자에게는 어떻게든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게 되는 것이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의 일이다. 하지만 단테의 칼날은 베아트리체를 향해 직접적으로 향하지는 않고 있다. 단테는 사랑의 배신자에 대해 사회적 의미를 넘어, 또한 정신적 의미를 넘어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쓴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의 가장 깊은 바닥에 [배신자의 방]을 만들어 넣는다. 이로서 단테는 칼날을, 베아트리체가 아니라, 우리를 향해 휘두르고 있다. 어쩌면 그 칼날은 단테 자신에게도 향하고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신곡>은 단테가 1308년경부터 1321년까지, 약 13년에 걸쳐 집필한 작품이다. 나이로는 마흔세 살에서부터 단테가 세상을 떠난 해인 쉰여섯까지에 해당한다. 단테는 13년이란 시간 동안 <신곡>을 집필하면서, 베아트리체를 향한 자신의 사랑이, 그녀에게서 받은 상처와 트라우마가, 잘못된 열쇠로 문을 열려고 했던 스스로의 어리석은 짓에서 온 것임을 깨쳤던 것 같다.  


단테는, 자신이 휘둘렀던 그 칼날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알아차리게 된 1321년에, <신곡>의 집필을 마무리함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이로서 단테의 그의 떠남에 대해 ‘자의적인 탈출’이라는 더 높은 차원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만들었다.       


무언가를 마무리한다는 것은 늘 힘든 일이다. 펜을 놓으려다가 피렌체의 거리로 다시 나선다. 

“사람은, 평생을 두고 사랑할 만한 가치 있는 존재인 걸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람에게 남는 것은 고독뿐일 텐데, 그 먹먹함을 어떻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은, 고독하지 않기 위해 사랑하는 걸까, 사랑하기 때문에 고독하지 않는 걸까.”

"지고지순의 사랑이란 건, 단지 글쟁이의 텍스트 속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환영은 아닐까."

     

<이솝우화>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고 보니 글의 말미마다 이솝우화를 떠올리는 것이 거듭되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우화와 같은 것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단테의 <신곡>에게서 우화의 명암을 발견하는 것을 잘못된 행위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 단테의 <신곡>은 한낱 우화와도 같은 이야기일 수 있지. 등장인물이 동물이 아니라고 해서 우화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게지. 사람 또한 동물이며, 사람에 따라서는 동물보다 못하거나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란 말인가."


결국 <신곡>은, 평생을 바쳐 사랑한 여자로부터, 사회로부터 버림받은(또는 버림받았다고 믿는) 단테가, 자신의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를 바탕으로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단테는 <신곡>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종교적으로 승화시킴으로써 배신감으로 인한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려 했을 수 있다. 


"<신곡>은 사랑의 속성인 버려짐과 배신이 낳은 통속의 미학이다."라고 말해도 좋겠다. 단테는 <신곡>을 통해 사랑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이에 맞닿아 있는 사회적 트라우마 또한 통속이 가질 수 있는 미학으로 포장하고 있다.   


이제 객실로 돌아가 글을 마쳐야 할 시간이다. 무언가를 해야 할 시간은 늘 불현듯 다가온다. 

펜을 내려놓기 전에 단테에게 한 가지 더 묻고 싶다. 

“사랑은 우화와 같은 것이며, 사랑의 트라우마는 한낱 통속인 것일 뿐이고, 통속을 삶이 주는 미학과도 같은 것이라고 여긴다면, 사랑한다는 것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되며, 살아가는 것이 좀 더 평온해지게 되는 걸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