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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1 - 정경, 오래된 기억

그 남자#1 - 정경, 오래된 기억


주민등록증 앞자리에 박혀 있는 검은색의 숫자들에 따르면 일천 구백육십 년대의 중반으로 접어든 해의 여름의 끄트머리이자 가을의 어귀 무렵에 그 남자의 번째 호흡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삶을 조금 깊게 들여다보게 되면 아마도 그날, 큰 울음을 터트렸기보다는 아직 뜨지 못한 두 눈의 시신경을 어떻게든 끌어올려 어둠과 빛의 실루엣을 두리번거렸을 것이고,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두 귀의 청신경을 한껏 세워 주변의 상황을 탐지하려 했을 것이라고, 누가 그렇다고 말해 말해준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날에도 이미 ‘그’였을 것이기에, 분명 그랬을 것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추측해 볼 수 있다.


정확한 것들을 더듬을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의 삶의 터전이 된 그곳은, 여름이면 최류가스를 마신 것만큼이나 진절머리 치게 만드는 무더위가 일상이었고 겨울이면 혹독하다는 말이 저절로 새어 나올 만큼이나 매서운 추위에 몸을 웅크려야만 했던, 분지라는 지형적 특성을 가진 한 도시의 언저리 끝자락에 붙어있었다고 한다.


그 도시에서 삶을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모종의 복선이 그의 삶에 심겨있었을 것이라고, 그래서 그와 그 도시는 애증으로 엮어 있는 관계일 거라고, 누군가 어느 날 말을 했던 것 같다.

그 도시에는 [대구]라는 지명이 붙어있긴 했지만 해가 지는 방향을 향해 비스듬하게 걸어 들어가다 보면 이내 [달성군]이라는 시골명이 흙먼지 날리는 찻길 옆 표지판에 걸려 있었고, 하나는 조금 높고 다른 하나는 조금 낮은 두 개의 봉오리가 옹기종기 솟아 있는 뒷산이 [두류산]이라는 글자를 도드라지게 새겨 안고서는 키 큰 장승처럼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주소의 앞자리에 붙어 있는 대구라는 지명이 아니었다면 그곳은, 도시의 자락이라기보다는 강아지풀과 잡초가 허리춤까지 우거진 들판과, 벼와 보리가 번갈아 자라는 논과 논 그리고 밭과 밭과, 땅골못이니 감산못과 같이 제 이름 석자를 가진 저수지들과, 물웅덩이라고 하기엔 제법 크지만 그렇다고 이름을 붙이자니 뭣해서 ‘거기’니 ‘저기’니 하는 식으로 그냥 얼버무려 부르던 저수지 몇 개가 들판이며 논과 밭 군데군데 퍼질러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던, 그래서 누군가 그곳을 도시라고 부른다면 냉큼 손이라도 저어 정색을 해야 할 것 같은, 밥 짓는 연기가 깨진 굴뚝 끝에서 나른하게 피어오르는 담묵빛 정경의 시골마을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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