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카라바조의 스승'인 시모네 페테르자노(Simone Peterzano, c.1535 – c.1599)는 16세기 북부 이탈리아의 밀라노를 중심으로 활동한 <후기 매너리즘> 화가로 알려져 있다.
앞서 얘기한 것과 같이 카라바조는 시모네 페테르자노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운영하는 밀라노의 화실(공방)에서 약 4년 간의 도제 생활을 통해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그래서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화실은 ‘화가 카라바조’가 있게 한 산실이며, 십 대의 카라바조가 먹고 자고, 또래 및 선후배 예비 화가들과 몸과 마음을 부대끼면서 청소년기의 소중한 시간을 보낸 기숙형 예술학교였던 것이다.
돌아갈 집이 없는 십 대의 카라바조에게(화실 생활을 시작할 당시 카라바조는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를 잃은 상태였다.)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화실은 ‘화가가 되기 위해 미술을 익히는 곳’을 넘어, 의지할 사람이나 돌봐줄 사람 하나 없이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했기에, 살아남는 방법을 알아가게 만드는 치열한 생활의 현장이었을 것이다.
화가의 작품에서 그 화가가 살아온 길이 더듬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카라바조의 예술을 떠올리면서 그의 스승인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예술과 그의 화실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화가로서 카라바조의 뿌리가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화실에 닿아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시모네 페테르자노에 대해서는 ‘카라바조의 스승’이라는 점만이 부각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의 예술과 행적에 관한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카라바조라는 산이 워낙 높고 크기 때문에 시모네 페테르자노는 카라바조가 드리운 그늘 속에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카라바조의 그림에서 시모네 페테르자노의 영향을 찾아보는 것은 ‘카라바조 예술의 뿌리’를 들여다보는 것이기도 해서 적지 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시모네 페테르자노는 밀라노라는 대도시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화실까지 운영했던 당대의 유명 화가였다.
따라서 분명 상당히 많은 수의 작품을 그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작품의 수는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이나 아주 작다.
컴퓨터를 켜고 ‘화가 시몬네 페테르자노’를 검색을 해보면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금방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시몬네 페테르자노는 비록 자신의 당대에는 잘 알려진 유명 화가였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단지 ‘한 시대를 풍미한 실력 좋은 한 사람의 예술가’ 정도로만 남겨져 있다.
사실 지금까지 셀 수 없을 만큼이나 많은 예술가들이 그들 나름의 작품활동을 하다가 떠나갔지만, 세상은 ‘실력 좋은 예술가’ 전부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서도 오직 ‘최고 중에서도 최고의 예술가’만을 중심으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애석하게도 시모네 페테르자노는, 카라바조라는 천재 예술가와 비슷한 시기에 그림을 그렸고, 종교화라는 작품의 성격이나 화풍에서 겹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카라바조가 만들어낸 거대한 그늘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참으로 야박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역사에서 그리고 지나간 일에 대해서, “그때 그랬더라면.” 또는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식의 가정 따위는 아무런 쓸모없는 일이다.
하지만 “만약 시모네 페테르자노가, 부모를 잃은 열세 살의 고아 소년 카라바조를 자신의 화실에 도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시모네 페테르자노에게는 또한 세상에는 어떤 일이 생겨났을까.”라는 생각에 휩싸이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생각은 들판을 휘몰아가는 바람처럼 이리저리로 두서없이 불어가면서, 멈출 듯 멈출 듯하다가도 불쑥 뿔쑥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기를 지침 없이 거듭거듭한다.
몇 점 남아 있는 시몬네 페테르자노의 작품들 중에서 <시몬네 페테르자노의 자화상>과 <그리스도의 매장>을 감상하면서, 시몬네 페테르자노의 예술과 카라바조의 예술의 연관성을 더듬는 시간을 갖는 것 또한 카라바조를 좇는 이로서는 아주 즐거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