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제생활이 끝난 직후의 카라바조의 4년(1588-1592)
카라바조(1571–1610)는 1584년에서부터 1588년까지 약 4년간의 도제 생활을 마친 뒤에도, 로마로 거처를 완전히 옮겨간 1592년까지, 나이로는 17살 무렵에서부터 21살 무렵까지, 약 4년이라는 시간 동안을 더 밀라노와 이탈리아 북부지역에서 머물렀다.
이 기간의 카라바조의 행적에 대해서도 신뢰할만한 기록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카라바조가 남긴 그 후의 작품들과 행적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는 가늠해 볼 수 있다.
1588년에서부터 1592년까지 카라바조는 밀라노와 이탈리아 북부의 그 인근 지역에서 지내면서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베네토 주]와, 밀라노를 중심으로 하는 [롬바르디아 주]와 같은 지역에서, 당시 유행하고 있던 자연주의 화풍과 후기 매너리즘 화풍에 관심을 갖고 익힌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들은 이탈리아의 남부지역들과는 달리 유럽 대륙과 바로 접해 있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과의 물적인 교류뿐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교류 또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한 이러한 교류는 예술에 있어서도 다양한 형태의 영향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카라바조는, 1584년에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물려준 유산이 아직 어느 정도는 남아있었기에 경제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카라바조의 이 시기의 생활에 대해서 “이때의 카라바조는 경제적으로 어렵게 지냈다.”라는 식으로 기술한 몇몇 문헌들이 있긴 하지만, 그런 것들은 단지 그것을 텍스트화한 이의 상상이 만들어낸 근거 없는 묘사들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그들의 묘사는, 이 4년의 시간이 지나가고 카라바조가 로마로 완전히 옮겨간 바로 직후에 겪었던 ‘초기 로마 시절의 궁핍했던 생활’을 두고 시곗바늘을 앞으로 돌려서 "그 이후에도 그랬으니 그 이전에도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라고 추측한 것에 불과하다.
이 시기에 카라바조가 처했던 상황들과 행적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일거리를 찾아 헤매지 않더라도, 이탈리아 북부의 여러 지역들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당대와 이전 시대의 여러 유명 작가들의 매혹적인 작품들을 마음껏 감상하였고, 또한 그들의 화풍을 탐구하고 익히며 지내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경제력’은 가졌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십대의 카라바조는, 당시가 16세기 말이란 시대적 상황을 감안한다면, 먹을 것과 지낼 곳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일이든 간에, 설사 그 일이 그림을 그리는 것과 연관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해야만 했을 것이다.
만약 1588년에서부터 1592년까지 카라바조가 이와 같은 상황에 처했었다면, 오늘날의 우리가 알고 있는 화가 카라바조는, 존재하긴 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살다 간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되어 조용히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시기에 카라바조는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의 식당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전성기 르네상스(High Renaissance) 최고의 걸작인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 Leonardo da Vinci)의 <최후의 만찬>(c. 1495–1498, The Last Supper, Italian: Il Cenacolo, L'Ultima Cena, Santa Maria delle Grazie, Milan)과 같은 보물 같은 예술작품들을 두루두루 감상하고 탐구하면서 카라바조만의 커다란 두 눈과 넓은 가슴으로 세심하게 분석하고 익히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또한 베네치아와 피사 같은 이탈리아 북부의 여러 거점도시들을 마치 유랑자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당시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유명 지역 화가들의 작품들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탐구하면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정립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이때의 시간이 지나고 1592년 이후에 전개되는 카라바조의 작품들을 통해 더듬어 보면, 1588부터 1592년까지 4년이라는 이 자유로운 시간 동안 카라바조는 영원의 도시이자 세상의 중심인 로마에서 당시 유행하고 있던 전통적인 매너리즘의 '틀에 갇힌 듯 양식화된 형식과 웅장함 및 단순함'보다는 '자연주의적인 디테일'에 주된 관심과 가치를 둔 독일 자연주의에 가까웠던 롬바르디아 지역의 자연주의적인 매너리즘 화풍에 중점적으로 관심을 갖고 익히면서 카라바조 식의 화풍으로 발전시켜 나갔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아마도 그것은 그 시기에 카라바조가 주로 머물렀던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 지역(주도는 밀라노이다.)이 비록 이탈리아에 속한 하나의 주이긴 하지만 지역적으로나 문화적으로는 독일과 더 가까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록 카라바조가 그림을 배우고 익힌 [시모네 페테르자노 화실] 시절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이나 작품(또는 습작), 도제가 끝난 후에 로마로 옮겨가기 전(1588부터 1592년까지)의 행적과 작품에 대한 기록은 제대로 전해지고 있지 않지만, 세속을 상징하는 어둠과, 성스러움을 상징하는 빛을 이용한 종교적 메시지의 전달 기법, 그림 속 등장인물들의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표정과 동작, 사물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 등과 같이, 당시 롬바르디아 지역에서 활동했던 작가들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자연주의적인 매너리즘의 특징들을 카라바조의 작품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시기의 카라바조가 접하고 관심을 가졌던 화풍이, 위에서 기술한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얘기해도 좋을 것 같다.
여기에서 카라바조 예술의 중요한 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카라바조의 테네브리즘(음영법)이 표현하려는 것이 ‘무엇’이며 또한 ‘그 시작이 어디에서부터’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카라바조는 어째서 그토록 빛과 어둠에 집착하였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을 이끌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카라바조의 작품에서 어둠은 세속을 상징하며 밝음은 성스러움을 상징하고 있다.
물론 카라바조 작품에서의 빛과 어둠이 갖는 메시지는 작품마다 case by case의 형태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어 모든 것을 ‘세속과 성스러움’이라는 한자의 상징성만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카라바조의 작품에서의 ‘빛과 어둠은 인간의 외형적인 면과 내적인 면’, 즉 ‘인간이 가진 이중성’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카라바조의 빛과 어둠은 카라바조가 가졌던 ‘트라우마로 인한 세속에서의 고통과 종교적인 구원의 갈구’하는 카라바조 자신의 정신세계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작품 전반에 깔려 있는 ‘세속을 상징하는 어둠과, 성스러움을 상징하는 빛의 대비’는, 작가인 카라바조가 자신의 그림을 감상하는 이들 각각에게 종교적인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신저’(messenger)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즉, 카라바조의 빛과 어둠은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속의 혼탁함’과 ‘구원받은 이가 살아갈 성스러운 곳의 깨끗함’을, 그래서 종교적으로 구원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은밀하지만 강렬한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화가 주를 이루었던 당시의 화단에서 ‘성스러운 곳의 깨끗함과 세속의 혼탁함’을 작품에 담아내는 것은 모든 예술가들의 지상과제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성스러움을 상징하는 빛’이라든지, ‘세속을 상징하는 어두움’을 예술작품 속에 표현하는 것은 카라바조 이전부터 있어온 예술가들 대부분의 주된 화두였을 수밖에 없다.
카라바조는 이 전통적인 과제를 테네브리즘이라는 자신만의 음영법으로 풀어냄으로써 회화예술에 있어서 혁신적인 화풍을 정립시킨 화가이다.
이러한 카라바조 식의 음영기법인 테네브리즘은 카라바조가 도제 생활을 마친 후 1588부터 1592년까지 약 4년 동안 이탈리아 북부지역에 머물던 당시, 그들 지역에서 유행하던 화풍과 기존의 유명 종교화들을 자유롭게 탐구하고 분석하면서 점차 자신의 것으로 정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카라바조에게 있어 도제 생활을 마친 후의 약 4년은, 그가 화가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시간이었다.
이 4년 동안에, 이제 갓 도제생활을 마친 열일곱 살의 풋내기 무명화가 카라바조는 자신이 갇혀 있던 알을 깨뜨리고 세상 밖으로 나와서 지금의 우리가 알고 있는 화가 카라바조가 거듭나기 위한 여정 위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이 4년간의 예술적 탐구의 시간이 아니었다면, 카라바조의 예술은, 긍정적인 방향으로든 부정적인 방향으로든, 분명 크게 다른 방향으로 향했을 것이다.
카라바조가 이 4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가 물려준 유산 덕분이었다.
어머니가 13살의 소년 카라바조에게 물려준 한 움큼의 물질적인 유산은 위대한 화가 카라바조가 있게 한 ‘작지만 너무나도 거대한 유산’이 되었다.
어머니의 이 유산이 화가 카라바조의 예술이 싹을 틔워 자라날 수 있게 한 밑거름으로써의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13살의 카라바조가 겪은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죽음의 트라우마’를 남긴 것뿐만이 아니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지독한 고민에 빠지게 했을 것이다.
그러한 고민은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살아가는 것은 왜 이리도 고단한 것인지.”, “잘 살아간다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왜 이렇게 혼탁한 것인지.”와 같은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 트라우마와 고찰은 카라바조의 작품 속으로 스며들어 ‘세속의 고난을 상징하는 어둠’이 되었으며, ‘성스러움을 상징하는 밝음’을 통해 자신과 어머니를 세속의 혼탁함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카라바조의 어머니가 카라바조에게 남겨준 유산은 비단 물질적인 것으로만 국한시켜서는 안 되고, 형이상학적인 영역으로까지 승화시켜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한다.
카라바조의 어머니는 카라바조의 예술이 있게 해 준 토양이자, 자기 몸을 불살라야만 비로소 불을 키울 수 있는 불쏘시개 그 자체였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쨌든, 어머니가 남겨준 물질적인 유산이 있었기에 카라바조는 1588부터 1592년까지 약 4년 동안 이탈리아의 북부지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예술적 탐닉’에 빠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유산은 많지 않았기에 1592년 21살의 카라바조가 로마로 옮겨갈 때는 이 유산을 이미 완전히 소진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