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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의 고등학교 시절: 시모네 페테르자노 화실

시모네 페테르자노 화실: 카라바조의 고등학교 시절


기술한 바와 같이 카라바조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인 1584년부터 1588년까지, 나이로는 열세 살 무렵에서부터 열일곱 살 무렵까지(서양에서는 나이를 말할 때 태어난 날로부터 얼마가 지났느냐가 기준이 되기 때문에, 태어난 연도를 기준으로 나이를 계산한 방식과는 적게는 1살에서 많게는 2살 정도의 차이가 있다. 이로 인해 카라바조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한글로 된 기존의 관련 문헌들에서는 카라바조의 나이에 대해 약간씩의 차이를 갖고 있다.), 약 4년이라는 시간을 밀라노의 시모네 페테르자노 화실(공방)에서 도제로 지내면서 화가의 길에 발을 디뎠다.

이 화실의 설립자인 시모네 페테르자노(c.1535–c.1599, Simone Peterzano)는 당시 밀라노를 중심으로 활동한 인기 있는 후기 마니에리즘* 화가였다.


/* 매너리즘(Mannerism)은 유럽 예술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에 나타났던 예술 양식으로,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고전 르네상스 후반기를 말한다. 문헌에 따라서는 하이르네상스(High Renaissance) 또는 후기 르네상스라고도 번역하고 있다.) 시기인 약 1520년경에 등장하여, 1530년 경에 널리 퍼졌다. 이탈리아에서는 16세기말까지 지속되다가 점차 바로크 양식으로 넘어갔다. 이에 반해 북유럽에서의 매너리즘(Northern Mannerism)은 17세기 초까지도 지속되었다.

일반적으로는 “매너리즘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의 과도기적인 예술 양식으로써, 약 1520년경부터 1600년대 초반(16세기 초반에서부터 17세기 초반)까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유행했던 회화 양식으로 잘 잡힌 조화와 균형, 자연주의의 부드러움과 같은 르네상스 양식에서 벗어나, 더 인위적이고 복잡하며 예술가의 주관적 감정의 표현을 추구하였다.”라고 기술할 수 있다.

Mannerism이라는 표현은 이탈리아어 ‘maniera’(스타일, 방식)에서 유래했으며, 초기에는 ‘세련된 스타일’을 의미하였지만 점차 ‘자연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보다 예술가의 주관적인 스타일을 강조하는 스타일’로 해석되었다. 대표적인 매너리즘 예술가로는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 야코포 다 폰토르모(Jacopo da Pontormo, 1494–1557), 파르미자니노(Parmigianino, 1503–1540) 등을 꼽을 수 있다. */


서양의 현재 교육 시스템과 비교해 보면 카라바조의 1584년부터 1588년까지는 고등학교 재학기간과 거의 일치한다.

실제로 미국의 많은 주(State)들의 교육시스템은 고등학교 과정 4년, 중학교 과정 3년, 초등학교 과정 5년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스템에 따르면 태어난 월과 일에 따라서는 고등학교 과정에서 수학하는 나이가 14살에서부터 18살까지 이거나, 13살에서부터 17살까지가 된다.

따라서 카라바조가 13살이 되던 해인 1584년에서부터 17살이 되던 해인 1588년까지 약 4년간의 도제생활을 통해 그림을 익힌 시모네 페테르자노 화실은, 현재의 미국식 교육 시스템에서는 미술교육이 특성화되어 있는 특목고(특수 목적 고등학교)에서 재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유럽에서는 유명 기성 화가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화실에서 도제 생활을 통해 화가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들 화실마다에는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스스로 들어온, 또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어린 나이에 부모의 손에 이끌려 들어온, 또는 피치 못할 가정 형편으로 인해 버려지듯 맡겨진 소년기와 청소년기의 아이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채로 선후배 도제들과 뒤엉켜 생활하면서 그림을 익히며 성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화가가 되어 스스로의 능력으로 화실의 문을 열고 당당하게 걸어 나갈 수 있는 날까지 ‘도제’ 또는 ‘견습생’의 신분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도제 생활을 마친 후에도 ‘보조화가’라든가 ‘예비 화가’ 또는 ‘수습 화가’라는 이름으로 화실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화실에서 해야만 하는 일이면서 또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화실의 설립자이자 운영자인 스승의 지시에 따라 작품의 한 부분을 그리면서 언젠가 자신 또한 기성 화단에 이름을 알리게 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었다.


1588년에서부터 1592년까지, 십대 청소년기의 카라바조 또한 그들의 사정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화실에서 같이 지내던 다른 구성원들보다 카라바조의 사정은 훨씬 못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흑사병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화실에 들어왔기 때문에 카라바조에게는 돌아갈 집과 반겨줄 부모님이 없었다.

그렇기에 카라바조는, 시모네 페테르자노 화실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지내면서도 그들보다 훨씬 더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청소년기의 카라바조에게 ‘그림을 그리는 것’은 화가가 되기 위한 수련일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구원으로 이끌어 주는 성전의 빛이자 제단이고 십자가였으며 현실의 어두움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뿐인 마지막 비상구(last exit)였을 것이다.

‘카라바조의 테네브리즘’은, 바로크 미술은 십대의 카라바조가 이 시기에 육체와 정신으로 겪으면서 느낀 현실의 컴컴한 어두움과 구원의 환한 빛에서 이미 자라나고 있었다.


십대의 카라바조는 그림을 그리면서 비로소 꿈을 꿀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카라바조는, 언젠가는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화가가 될 것이며, 결국에는 자신의 스승처럼, 아니 스승의 명성을 뛰어넘는 유명한 화가가 되리라는 원대한 꿈을 가슴 가득 그려 넣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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